달러코인 퍼지는데…'이대로 가다간' 한국 초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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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는 우리 돈이지만 당신들의 문제다.” 요즘 국내외 통화·금융 시장의 변화를 보면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닉슨 미국 대통령 시절 존 코널리 재무장관의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기회로 폭발 중인 스테이블 코인 시장이 한국인의 삶은 물론이고 원화 주권 약화라는 본질적 위험을 부르고 있어서다. 미국은 숙명처럼 ‘트리핀 딜레마’를 겪는다지만 그 딜레마를 감내하면서 홍역을 앓는 쪽은 언제나 힘없는 약소 통화국이다. 지금은 인공지능(AI) 혁명기인 동시에 통화 혁명기다. 스테이블 코인이 그 중심에 등장했다.

美, 달러패권 지키려 '달러코인' 강행…'약소 통화국' 韓무역·결제시스템 초비상

스테이블 코인은 ‘코인’ 아닌 ‘화폐’

스테이블 코인의 가장 간략한 정의는 ‘블록체인상 법정화폐’다. ‘1코인=1달러’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됐다. 블록체인은 분산 컴퓨팅 기반의 데이터 위변조 방지 기술로 탈중앙화, 불변성, 보안성, 투명성이 특징이다. 블록체인의 첫 구현체가 비트코인이다.

스테이블 코인 대장주 테더는 코인시장 비중이 4.1%다. 비트코인(54.0%) 이더리움(11.9%)에 이어 3위지만 무게감은 남다르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이지만 스테이블 코인은 ‘디지털 통화’, 다시 말해 화폐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어서다. 미국에선 스테이블 코인을 중앙은행(Fed) 연방예금보험공사(FIDC)와 함께 미 통화감독청(OCC)이 감독하는 입법이 마무리 단계다. 그 밖의 코인은 기본적으로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관할이다. 이 같은 ‘통화성’ 때문에 스테이블 코인을 여타 가상자산과 분리해 감독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저비용·신속 결제 앞세워 통화시스템 위협

전 세계 스테이블 코인의 98%는 달러 기반이다. 쌍두마차인 테더(USDT)와 서클(USDC)도 달러 코인이다. 두 코인의 점유율은 85%에 달한다. 달러 스테이블 코인은 가상자산시장의 기축통화로 자리매김했다. 결제 과정이 매우 간편해서다. 국경 간 송금이 빠르고 수수료가 적다는 강점을 바탕으로 실생활에서도 급속히 확산 중이다. 24시간 연중무휴에다 높은 수수료도 획기적으로 절감된다. 은행계좌가 없는 지구촌 20억 명에게 금융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아프리카 남미 등 통화가치 변동성이 큰 국가에선 테더로 피신하는 사례가 넘친다. 테더 사용이 일상화한 아르헨티나는 외환시장이 이원화돼 비공식 민간시장과 정규시장의 환율 격차가 50%를 웃돈다.

스테이블 코인 가치는 100% 보장되나

스테이블 코인의 알파요 오메가는 ‘언제나 법정화폐로 상환이 보장된다’는 신뢰다. 코인 소지자가 인출을 요구하는 즉시 확정 금액을 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합리적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코인런’이다. 이런 믿음은 철저한 준비자산 대응에서 나온다. 1달러를 받아 1코인을 발행한 뒤 국채, 예금 등 안전자산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100% 안전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코인회사들이 유동성의 대부분을 투입하는 미 국채마저 안전도 100%는 아니기 때문이다. 국채를 팔 수조차 없는 극단적 위기 국면이 주기적으로 오기 때문이다. 2년 전 미국 역사상 두 번째 규모의 은행 파산인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가 이를 잘 보여줬다. 급속한 금리 인상 여파로 포트폴리오의 절반을 채운 미 국채 가격이 급락하자 36시간 만에 55조원이 탈출했다. 당시 서클은 1코인당 0.88달러까지 추락하는 ‘디페깅’을 겪었다. 코인 사업자의 도덕성 이슈도 만만찮다. 담보가치보다 더 많은 코인을 발행할 부정 가능성이 상존한다.

국제금융시장 집어삼키는 달러 코인

조 바이든 행정부 때만 해도 미국과 세계는 스테이블 코인에 부정적이었다. 페이스북(현 메타)이 2019년 스테이블 코인 ‘리브라’ 출시 구상을 밝히자 미 의회는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를 청문회에 세우고 융단폭격했다. 각국 정부도 ‘통화 주권 위협’이라며 연합 전선을 형성하자 저커버그는 중도 포기를 선언했다.

“트럼프 취임으로 미국 내 분위기는 180도 반전” (이승석 한경연 책임연구위원)됐다. 미래 화폐로서의 잠재력, 미국 국채 수요처, 전통 금융권의 새로운 사업 기회 등으로 부각하고 있다. 테더 한 회사가 지난해 미 국채 매입액 순위 7위를 기록했다. 올 1분기 말 테더와 서클이 보유한 미 국채는 1283억달러로 한국(1249억달러) 독일(1114억 달러)보다 많다. 국제금융시장 파워 측면에서 웬만한 국가 못지않다는 의미다.

통화주권 흔들, 외환금융시장 요동

코인은 편의성 관점에서 독보적이지만 통화 주권 훼손 논란을 피하지 못한다. 원화 수요를 대체하고 통화정책 유효성을 떨어뜨린다. 달러 코인이 국내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는 경우 발생할 부정적 효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달러 스테이블 코인 도입을 신중히 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달러의 대체재인 탓에 외환관리법 차원의 규제도 필수다.

적잖은 나라가 이런 우려를 공유한다. 유럽연합(EU)이 대표적이다. 역내에서 통용되는 스테이블 코인은 유럽 내에서 준비자산을 쌓도록 강제하는 가상자산포괄규제법(MiCA)을 작년부터 시행 중이다. 스테이블 코인이 일정액 이상 늘지 못하도록 한도도 정했다. 중국도 본토에서 스테이블 코인 사용을 금지한다. 다만 무역결제 시 역외 위안화와 연동한 달러 코인이 일부 활용된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이 대안일까

달러 코인이 진격하자 원화 코인을 찍어서 이에 대항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기획재정부 차관 출신인 김용범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는 “원화 스테이블 코인을 빨리 도입해 국가전략 차원에서 디지털 통화질서 재편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권도 참전 중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원화 스테이블 코인 시장을 만들어 국부 유출을 막자”고 말해 논란을 키웠다. 민주당은 바로 원화 스테이블 코인 발행을 위한 디지털자산기본법을 공약했다.

하지만 원화 코인은 ‘대체화폐 허용’과 같은 중대 변화이기에 신중한 접근이 필수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의 실효성도 논쟁적이다. 고경철 한은 전자금융팀장은 “경쟁력이 취약한 원화로 코인을 만들어 통화주권을 방어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금융위원회 기재부 등 주무부처는 자칫 혁신 금융·기술의 발목을 잡느냐는 비판이 나올까 봐 몸을 사린다. 혁명적 기술을 활용하면서 원화 경쟁력을 강화하고 통화주권을 지켜내는 솔로몬의 지혜를 위해 머리를 맞댈 때다.

백광엽 수석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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