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서울 안전하다고 들었는데'…봉변 당한 외국인들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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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전 8시께 서울역광장을 지나던 40대 직장인 이모씨는 당혹스러운 장면을 목격했다. 빨간 팬티만 입은 한 노숙인이 여성 행인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시비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씨는 조심스럽게 “술에 취하신 것 같으니 텐트에서 쉬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지만, 노숙인은 화를 내며 이씨를 200m 가까이 뒤쫓았다. 결국 이씨는 자전거를 타고 자리를 피했다. 그는 “10년 넘게 서울역으로 출퇴근하면서 이런 장면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루평균 24건 신고

서울역 일대에서 정신질환이 의심되는 노숙인의 행패가 잇따르면서 시민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안에 떨고 있다. 하루 30만 명이 오가는 서울역은 외국인이 공항철도를 통해 가장 먼저 접하는 ‘서울의 관문’이지만,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의 관리 공백 속에 치안 사각지대로 방치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서울역파출소에 접수된 112신고는 2021년 7522건에서 지난해 8872건으로 약 18% 늘었다. 위급사항 최고 단계를 의미하는 ‘코드0’ 신고는 2020년부터 작년 6월까지 283건으로 서울 지구대·파출소 평균(175건)보다 62% 많았다. 서울역광장 안에 있는 서울역파출소는 서울역지하도, 서부역 등 주요 노숙인 밀집 지역을 관할한다. 이곳에 접수되는 신고 대부분이 노숙인 간 싸움, 노숙인 주취 소란 등 노숙인 관련 사건이다.

서울역 일대엔 약 200명의 노숙인이 상주하고 있다. 서울시복지재단에 따르면 서울시 거리 노숙인의 정신질환 유병률은 27.2%로, 국내 인구 유병률(6.5%)의 네 배를 웃돈다. 진료 질환별로는 조현병스펙트럼장애가 31.6%로 가장 많았고, 알코올사용장애(25.6%), 기분장애(16.1%) 등이 뒤를 이었다.

문제는 이들 중 일부가 행인을 대상으로 위협적 행동을 벌이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점이다. 지난달 7일 새벽 20대 직장인 김모씨는 서울역광장에서 노숙인의 위협을 받아 112에 신고했다. 노숙인은 “행실 똑바로 해라, 인공지능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며 횡설수설했고, 김씨의 길을 가로막으며 발길질을 했다. 출동한 경찰은 정신이상자로 보고 현장에서 즉시 분리 조치했다. 당시 경찰은 김씨에게 “밤 시간에는 노숙자가 많아 위험해 시민이 잘 피해 다니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자체·경찰 대응 역부족

불안을 호소하는 건 외국인 관광객도 마찬가지다. 최근 서울역광장을 찾은 미국인 관광객 나탈리 듀란(28)은 “가방을 내려놓고 택시를 부르던 중 술병을 든 노숙인이 다가와 가방을 열어 보려 했다”며 “막으려고 하자 병을 던지고 소리치며 달아났다”고 전했다. 미국인 대학생 제이슨 리(24)는 “서울이 안전하다고 들었는데 서울역은 마치 뉴욕 지하철 같은 느낌이었다”며 “노숙자가 행인에게 소리치는데도 경찰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이상했다”고 했다.

치안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지자체의 대응은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중구 관계자는 “거리노숙인 상담순찰반 네 명이 2개 조로 나눠 순찰하며 병원 연계나 보호시설 입소를 지원하고 있지만 본인이 거부하면 강제할 방법이 없다”며 “절반 이상이 도움을 주겠다고 해도 거절한다”고 털어놨다. 남대문경찰서 관계자도 “노숙인 관리를 위한 전담 경찰관이 있지만 1명이 24시간 근무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인력 부족으로 추가 배치할 형편도 안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신질환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러 기관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정신질환 노숙인 문제는 단일 기관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며 “경찰·지자체·의료기관이 협력해 노숙인의 정신 건강 상태, 범죄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개인별 맞춤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다빈/권용훈 기자 davinc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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