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 속 섬뜩함' 이혜영, '광기어린 차가움' 이영애, 두 얼굴의 '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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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영의 헤다가블러 vs. 이영애의 헤다가블러 전격 비교

하물며 쌍둥이도 성격이 천차만별인데, 원작이 같다고 다 똑같으랴. 이혜영과 이영애가 각각 주연을 맡은 헤다 가블러는 개막 전부터 다른 작품이 될 것이란 에상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차이는 꽤나 컸다. 배우의 연기 톤은 물론 소품, 의상 등 무대 연출 전반에 걸쳐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공연을 비교 분석하기 전, 헤다 가블러의 줄거리를 간략히 짚어보자. 헤다 가블러는 ‘근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890년에 쓴 동명 희곡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이야기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귀족 출신 여인 헤다가 겪는 단 이틀의 시간을 그린다. 빼어난 외모의 헤다는 사랑 없는 결혼 이후 지독한 권태에 빠진다. 때마침 옛 연인 에일레트가 다른 여성 테아의 도움을 받아 성공하는 것을 목격하며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다. 설상가상 원치 않는 임신은 헤다를 불안과 좌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그는 짓밟힌 자유와 무너진 존재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의상부터 확연한 차이

헤다 역의 배우 이혜영과 브라크 검사 역의 배우 홍선우가 연기하고 있다./사진=국립극단

헤다 역의 배우 이혜영과 브라크 검사 역의 배우 홍선우가 연기하고 있다./사진=국립극단

두 배우가 보여주는 헤다는 의상 색만큼이나 결이 다르다. 국립극단에서 선보이는 이혜영의 헤다는 낭만 없는 신혼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무기력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커다란 소파에 헤다가 힘없이 드러눕는 장면도 반복된다. 헤다의 무기력은 그러나 우아함으로 승화된다. 이는 이혜영이 극 중반에 입은 하얀 의상에서도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2012년 초연 당시 클래식한 의상에서 바뀐 백색 치마바지는 ‘웨딩 드레스’처럼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편, 마치 ‘빈 캔버스’처럼 공허하고 생기없는 헤다의 내면을 보여준다.

배우 이영애가 연기하는 헤다./사진=LG아트센터

배우 이영애가 연기하는 헤다./사진=LG아트센터

반면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이영애는 종잡을 수 없는 헤다를 중점적으로 그려낸다. 전반적으로 높은 톤의 목소리로 때로는 ‘귀여운 금쪽이’를, 때로는 ‘악녀’ 그 자체를 연기한다. 단아한 얼굴 뒤 차가움을 숨긴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를 떠올리게 한다. 오묘한 보랏빛 옷도 이런 이중성을 표현하는 데 힘을 실어준다. 이영애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헤다는 오묘한 보라색이 어울릴 것 같은 애매모호한 여자라 보라색 치마바지를 입자는 의견을 냈다”며 “바지를 입기엔 너무 겁쟁이고, 치마를 입고 집에서만 앉아있기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여성이라 치마바지를 입자고 했다”고 말했다.

‘채움’과 ‘비움’의 대비

헤다가 내면에 품고 있는 복잡성을 한 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는 관객들이 헤다의 감정에 쉽게 이입할 수 있도록 표현한다는 강점이 있다. 일단 대사부터 직관적이다. “내 시대가 가 버린 거죠”와 같은 헤다의 대사처럼 전달하려는 내용이 비교적 선명하다. 2012년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 초연 당시 ‘원조 헤다’를 맡았던 이혜영답게 연기도 어색하지 않고 매끄럽다.

반면 LG아트센터의 헤다 가블러는 무대 자체가 은유적이다. 무대를 최대한 비워내는 대신 몇몇 오브제(상징물)를 사용해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연출 의도는 있다. 노란색과 보라색으로 뒤섞인 풍선은 헤다의 꿈과 욕망을 표현한다. 무대 뒷편의 디오니소스 그림은 헤다와 에일레트가 공유하고 있는 자유와 광기, 나아가 예술적 본능을 상징한다.

배우 이영애가 연기하는 헤다./사진=LG아트센터

배우 이영애가 연기하는 헤다./사진=LG아트센터

헤다가 느끼는 사회적 압박을 표현한 방식도 다르다. 국립극단 작품은 중앙의 소파를 중심으로 책상, 의자, 조각품 등이 무대를 꽉 채운다. 여신동 무대디자이너는 “화려하고 편안해보이는 부잣집 내실 안에서 헤다가 느끼는 무기력함과 억압감을 표현하고자 했다”며 “헤다의 진짜 속마음은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듯이, 무대 뒤편에는 반투명 소재의 벽을 세워 헤다가 있는 공간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LG아트센터는 천장을 제외하고 사방이 막힌 회색빛 무대로 헤다의 심연을 나타낸다. 헤다의 집 안에는 창문조차 찾아볼 수 없다. 헤다는 높은 층고가 빚어내는 무거운 공기 속에 짓눌려 있는 듯하다. 모든 배우들이 공연 끝까지 퇴장하지 않는 것도 헤다에게 위압감으로 작용한다. 전인철 연출은 “이 공간(집)은 헤다의 정신적 감옥이며 내면세계”이며 “삼면의 벽은 헤다를 압박하는 사회적 질서”라고 말했다.

두 작품 중 도전적 연출이 돋보인 건 LG아트센터 무대였다. 무엇보다 화재 위험으로 극장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불’을 사용해 헤다의 파괴적 면모를 효과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헤다는 에일레트의 자식과도 같은 원고를 불태우는데, 이때 불 뒤로 이영애가 짓는 희미한 미소는 하녀 베르테가 실시간으로 촬영하는 라이브 영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되며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국립극단 무대에선 실제 불 대신 조명으로 만든 불쏘시개 소품을 사용했다. 명동예술극장에선 불을 사용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서다.

헤다 역의 배우 이혜영이 총을 들고 무대를 누비고 있다./사진=국립극단

헤다 역의 배우 이혜영이 총을 들고 무대를 누비고 있다./사진=국립극단

엔딩 장면 연출도 대비된다. 국립극단 무대는 직관적이면서 강렬하게 마무리된다. 특히 이혜영이 총을 손에 들고 자유로운 몸짓을 펼칠 때는 그가 영화 ‘파과’에서 맡은 킬러 역을 연상시키듯 섬뜻한 기운이 객석으로 밀려들어온다. 반면 LG아트센터 무대는 모호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헤다가 선택한 자신의 결말을 역시나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스포일 방지’를 위해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자유를 갈망한 인간에 바치는 찬사

입센이 헤다 가블러를 처음 발표했을 때 세상은 냉혹했다. 노르웨이 평론가 알프레드 신딩-라르센은 헤다에 대해 이같은 평가를 내렸다. “헤다 가블러는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끔찍한 산물에 불과하다. 현실에선 이런 인물을 찾아볼 수 없다.”

시간이 흘렀어도 헤다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는 타인을 통제하려 하면서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종속되는 것에는 반발하는 ‘내로남불’ 캐릭터다. 에일레트와 테아의 ‘자식’과도 같은 원고를 불태울 때는 잔인하다는 말조차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 역시 때때로,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않은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굴레와, 그 속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내면에 공감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헤다는 남편의 성을 따른 ‘헤다 테스만’이 아닌,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헤다 가블러’라는 이름으로 살길 원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여성의 삶을 다룬 이야기를 넘어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존재의 이야기로 읽힌다. 어쩌면 그것이 21세기 한국에 헤다 가블러가 찾아온 이유 아닐까.

클래식의 정수를 느끼고 싶다면 이혜영의 헤다, 상징적 무대 연출을 선호한다면 이영애의 헤다를 추천한다. 이혜영의 헤다는 6월1일까지, 이영애의 헤다는 6월 8일까지다.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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