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 속 섬뜩함' 이혜영, '광기어린 차가움' 이영애…두 얼굴의 '헤다'

하물며 쌍둥이도 성격이 천차만별인데, 원작이 같다고 다 똑같으랴. 이혜영과 이영애가 각각 주연을 맡은 연극 ‘헤다 가블러’는 개막 전부터 다른 작품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차이는 꽤 컸다. 배우의 연기 톤은 물론 소품, 의상 등 무대 연출 전반에 걸쳐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채움’과 ‘비움’의 대비

‘헤다 가블러’는 ‘근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890년에 쓴 동명 희곡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이야기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귀족 여인 헤다가 겪는 단 이틀의 시간을 그린다. 빼어난 외모의 헤다는 사랑 없는 결혼 이후 지독한 권태에 빠진다. 때마침 옛 연인 에일레트가 다른 여성의 도움을 받아 성공하는 것을 목격하며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다. 설상가상 원치 않는 임신으로 헤다는 무력감에 휩싸인다. 헤다는 무너진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국립극단이 선보이는 이혜영의 헤다는 낭만 없는 신혼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무기력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헤다가 소파에 힘없이 드러눕는 장면이 반복된다. 무기력은 그러나 우아함으로 승화된다. 이는 이혜영이 극 중반에 입은 하얀 의상에서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백색 치마바지는 ‘웨딩드레스’처럼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편 ‘빈 캔버스’처럼 공허하고 생기 없는 헤다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반면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이영애는 종잡을 수 없는 헤다를 중점적으로 그린다. 단아한 얼굴 뒤 차가움을 숨긴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주인공 금자를 떠올리게 한다. 오묘한 보랏빛 옷도 이런 이중성을 표현하는 데 힘을 싣는다.

헤다의 복잡한 내면을 한 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는 관객이 헤다의 감정에 쉽게 이입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데 강점이 있다. “내 시대가 가버린 거죠”와 같은 헤다의 대사처럼 전달하려는 내용이 비교적 선명하다. 2012년 ‘원조 헤다’로 활약한 이혜영답게 연기도 매끄럽다.

반면 LG아트센터는 무대 자체가 은유적이다. 무대를 최대한 비워내는 대신 몇몇 오브제(상징물)를 사용해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연출 의도는 있다. 노란색과 보라색으로 뒤섞인 풍선은 헤다의 꿈과 욕망을 표현한다. 무대 뒤편의 디오니소스 그림은 헤다와 에일레트가 공유하는 자유와 광기, 나아가 예술적 본능을 상징한다.

헤다가 느끼는 사회적 압박을 표현한 방식도 다르다. 국립극단 무대를 맡은 여신동 디자이너는 “소파, 책상, 의자 등으로 꽉 채운 부잣집 내실로 헤다의 억압감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반면 LG아트센터는 무대를 최대한 비우되, 높은 층고에서 오는 묵직한 압력을 활용한다. 모든 배우가 공연 내내 무대를 떠나지 않는 연출도 헤다에게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한다.

◇ 강렬한 엔딩 vs 여운 깊은 엔딩

두 작품 중 도전적 연출이 돋보인 것은 LG아트센터 무대였다. 화재 위험으로 극장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불’을 사용해 헤다의 파괴적 면모를 효과적으로 보여준 점이 인상적이다. 헤다는 에일레트의 자식과도 같은 원고를 불태우는데, 이때 불꽃 너머로 보이는 이영애의 기괴한 미소가 실시간 영상으로 관객에게 전달돼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국립극단 무대에선 실제 불 대신 조명으로 만든 불쏘시개 소품을 사용한다. 명동예술극장에선 불을 사용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서다.

엔딩 장면 연출도 대비된다. 국립극단 무대는 직관적이면서 강렬하게 마무리된다. 특히 이혜영이 총을 손에 들고 자유로운 몸짓을 펼칠 때는 그가 영화 ‘파과’에서 맡은 킬러 역을 연상시키듯 섬뜩한 기운이 객석으로 밀려 들어온다. 반면 LG아트센터 무대는 모호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클래식의 정수를 느끼고 싶다면 이혜영의 헤다, 상징적 무대 연출을 선호한다면 이영애의 헤다를 추천한다. 이혜영의 헤다는 6월 1일까지, 이영애의 헤다는 6월 8일까지 공연한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