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약속이 있어서 나왔다가 충격받았어요. 정말 심각해요."
수년 만에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을 찾은 천모씨(35)는 황폐하다시피 변한 가로수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너무 북적한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면서도 "이러다 단골로 가던 곳도 사라질까 봐 걱정이 된다"고 전했다.
원조 '힙플레이스' 가로수길의 침체가 장기화하고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옷 가게와 음식점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애플스토어 주변에만 사람들이 오갈 뿐이다.
◇ 유동인구·업체 생존율 '뚝'
15일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가로수길의 1ha당 유동인구는 8만8611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5%가 빠졌다. 현재 가로수길의 유동인구는 4분기째 감소세다.
가로수길 상권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지표들도 모두 악화하고 있다. 새로 생긴 업체들의 3년 생존율을 나타내는 '신생기업 생존율'도 내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폐업 건수 자체로는 분기별 40~50곳이 발생하고 있는데, "더 폐업할 곳도 이제는 없다"는 곡소리가 나온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사인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가로수길 상권의 공실률은 41.2%로 집계됐다. 이는 서울 주요 상권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 한 곳만 빼고 '텅텅'
지난 10일 한경닷컴이 신사역에서 출발해 가로수길을 가운데로 두고 오른쪽 도보를 걷다 보니 대부분 상가가 텅 빈 것을 확인했다. 그나마 애플스토어로 가는 길인 왼쪽 도보는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지만, 애플스토어를 빼면 인적이 드물었다.
애플스토어 관계자는 "주말에는 아침에 오픈을 대기하는 손님 5~6명 정도는 서 있다. 가로수길에 오는 이유가 애플매장 때문이라는 것에 공감한다"고 설명했다. 가로수길에 터를 잡은 애플스토어는 2018년 1월 20년 치 임대료 약 600억원으로 장기계약을 맺었다. 이후 애플스토어가 전반적인 임대료 상승에 영향을 미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원주민 내몰림)을 가속화시켰다는 비판이 나왔다.
부동산전문기업 알파카는 최근 유튜브를 통해 "애플스토어가 가로수길을 망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게 임대료를 다 끌어올렸다. 이거 하나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도 애플 건물주처럼 될래'라고 된 것이다. 그래서 다 같이 망한 케이스"라면서 "가로수길이 무너져갈 때 애플스토어가 생기면서 희망 고문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가로수길 곳곳에서는 '통임대', '임대 010-XXX-XXXX' 등 전화번호와 함께 임차인을 구하는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나마 숨이 붙어있는 곳에서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 액세사리 가게 직원 안모씨(24)는 "코로나 끝나고 여기 가게가 생겼는데 그때는 장사가 굉장히 잘됐다. 공실이 많으면 상권이 죽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기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내리는 게 아니고 예전에 가로수길 장사 잘되던 그때 그 가격 그대로 받다 보니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 같다"며 "최근 1년 동안 매출이 60% 정도 줄었다. 우리 매장도 폐업할 위기"라고 하소연했다.
또다른 옷 가게 직원 김모씨(28)는 "일단 사람이 많이 오지 않으니 공실이 생기고 공실이 생기니 사람이 줄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 임대료 못 내리는 진짜 이유
가로수길의 지속되는 침체 원인은 성수동 같은 대안이 생기면서 수요는 떨어졌는데도, 임대료가 떨어지지 않는 현상이 이어지면서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가로수길에는 애플스토어 외에 즐길만한 콘텐츠가 부족하고, 상점 간 연결고리도 없다"며 "현재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성수동이나 익선동처럼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트렌디한 상권 형성이 필요하지만, 가로수길은 변화에 뒤처졌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앙상한 가로수처럼, 가로수길이 텅 비는 현상이 한동안 계속되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대료를 낮추면 부동산 가치가 하락할 가능성에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내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알파카는 유튜브에서 "가로수길 자체가 쉽게 바뀌기가 어려운 게 건물주들이 되게 젊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분들이라는 뜻이고 이들은 급할 게 없다"고 진단했다.
선종필 상가뉴스레이다 대표는 "렌트프리(무상 임대) 기간을 늘리고 인테리어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임차인을 유치하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임대료 자체는 낮추지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신현보/유지희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