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기업 때문에 전기료를 너무 많이 내는 것 같아요. 숨은 세금이나 다름없어요.” 지난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시내에서 만난 재향군인회 직원 알리시아 프리에토는 “월 220달러(약 30만원)를 전기료로 낸다”며 하소연했다.
치솟는 전기료에 실리콘밸리의 민심이 들끓고 있다. 빅테크가 인공지능(AI)을 학습하기 위해 데이터센터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자 전력회사들이 인프라 구축 비용을 일반 고객에게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 역시 전국 곳곳에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겠다는 ‘AI 고속도로’ 공약을 추진하는 만큼 전기료를 둘러싼 갈등을 정책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골칫거리
지난 4월 새너제이 도시계획위원회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데이터센터 건립 요청을 승인하고 인근 노숙인 캠프를 철거했다. 이를 포함해 총 3개 신규 데이터센터가 새너제이에 들어서고 있다. 새너제이는 북부 캘리포니아의 데이터센터 절반 이상이 몰려 있는 ‘데이터 허브’다. 새너제이를 포함한 샌타클래라카운티에는 엔비디아, MS, 아마존웹서비스(AWS) 등 14개 회사가 55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테크기업 본사와 가까워 레이턴시(지연) 현상을 최소화할 수 있고, 태풍 등 자연재해가 드문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문제는 전력 용량이 한정돼 있다는 것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5월 샌타클래라카운티 도시계획위원회에선 추가 데이터센터 건설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찬성 측은 데이터센터가 재산세와 법인세 증가에 기여한다고 주장했지만, 전기와 냉각용수 사용량이 과도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새너제이 지역 발전사 실리콘밸리파워의 니코 프로코스 최고운영책임자(COO)는 “현재 전력 공급 최대치인 720㎿에 더해 500㎿를 추가로 요청받았다”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미국 13개 주요 전력회사 중 절반 이상이 데이터센터 기업에서 기존 발전 용량을 초과하는 전력 공급을 요청받았다. 사티아 나델라 MS 최고경영자(CEO)가 올해 초 “반도체가 아니라 전력이 AI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할 정도로 빅테크는 원활한 전력 공급에 사활을 걸고 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도 14일 “수년에 걸쳐 전력 공급을 최대 5GW까지 확장할 수 있는 데이터센터 하이페리온을 건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초대형 원자력발전소 3개의 발전 용량 수준이다. 메타는 하이페리온을 뉴올리언스주에 건설할 계획이며, 전체 면적은 뉴욕시 맨해튼과 맞먹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전력회사들은 수요에 발맞춰 전력망 확충을 서두르고 있다. 캘리포니아 북중부 지역에 전기를 보급하는 퍼시픽가스앤드일렉트릭(PG&E)은 올 4월 캘리포니아주 정부에 총 31억달러(약 4조2600억원) 규모의 요금 인상을 요청했다. 장거리·대규모 전력 전송에 효율적인 고전압직류송전망(HVDC)을 새너제이 변전소에 연결하고 스마트그리드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전력망을 현대화하기 위해서다.
◇빅테크, 전력회사 ‘각자도생’
실리콘밸리 주민들은 전력 요금 인상에 울상이다. 잦은 산불, 친환경 전력망 건설 등으로 이미 다른 주보다 요금이 높은 상황에서 부담이 가중됐기 때문이다. 새너제이 지역 전기료는 ㎾h당 31센트로 주 평균보다 2%, 전국 평균 대비 59% 높다. 지난 10일에는 새너제이 남부 지역에서 전력 과부하로 부분 정전이 발생했다. 이 지역 아파트를 관리하는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의 한 매니저는 “최근 2년간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이 같은 현상은 실리콘밸리만의 일이 아니다. 블룸버그통신은 14일 AI 인프라 기업 코어위브의 내부 문서를 입수해 코어위브가 가동하는 텍사스주 덴튼 데이터센터 때문에 이 지역 전력 수요가 2030년엔 현재의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코어위브는 9일 덴튼에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암호화폐 채굴 기업 코어사이언티픽을 90억달러에 인수했다.
비영리단체 파워라인스에 따르면 올해 미국 전력회사가 규제당국에 요금 인상을 위해 요청한 금액은 총 290억달러에 달한다. 텍사스주의 온코어는 지난달 말 총 8억3400만달러의 요금 인상안을 주 정부에 제출했다. 뉴욕, 매사추세츠 등 미 동부에 전력을 대는 내셔널그리드와 인디애나주 전력회사 노던인디애나서비스는 각각 총 7억8000만달러, 2억5700만달러의 요금 인상을 요청했다.
낮은 법인세 등을 통해 유럽의 데이터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는 아일랜드는 데이터센터발(發) 요금 인상을 막기 위해 데이터센터 운영사가 자체 전력망을 구축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