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드한 색감의 콘테이너 외관, 빛나는 중앙 로고가 발걸음을 잡는다. 여느 팝업스토어를 떠올리게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오락실이다. PC 게임과 휴대전화 게임의 등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던 오락실은 최근 가족 놀이 시설, 체험 공간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청량리 복합상업공간에 생긴 ‘청량오락실’도 그중 하나다.
기자의 첫 오락실에 대한 추억은 1990년대 초등학생 무렵이다. 몇 개의 동전을 가지고 주택가에 위치한 오락실로 향하는 오빠의 뒤를 따랐는데, 이를 부모님께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동행을 허락했었다. 오빠는 당시 인기 있던 ‘스트리트 파이터’ 등의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 또는 우주선 게임, 어드벤처 게임을 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나는 주로 ‘버블보블’, ‘스노우 브라더스’ 등 귀여운 캐릭터가 등장해 방울을 만드는 게임을 즐겼고, 학년이 오를수록 ‘DDR’, ‘펌프’, ‘DJ 게임’ 등 리듬게임 장르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PC, 휴대전화 게임이 등장하자 동네 오락실들은 경영난으로 점차 문을 닫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 시점은 2000년대 초반 성인용 오락실, 도박과 같은 사행성 게임장이 무분별하게 생기던 시점과도 맞물려 있다. 학생들 대신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인 오락실이 늘어나면서, 청소년 출입이 가능한 오락 시설에 대한 규제도 강화됐다. 이후 전통적 형태의 오락실은 점차 쇠퇴해져 갔다.
카드결제, 뽑기 등 현대 놀이공간…‘오락실의 변화는 현재진행 중 ’
그런데 이제는 번화가 일대에서 다층 또는 대형 규모로 지어진 오락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선명한 색감의 콘테이너 외관, 빛나는 중앙 로고가 존재감을 표출한다. ‘짱오락실’, ‘대빵오락실’··· 뭔가 승부욕을 불러오는 이름들이다. 이러한 프렌차이즈형 대형 오락실의 경우 1층엔 인형 뽑기 기계가 다수 배치돼 있고, 다른 층수에 우리가 아는 오락실 게임기가 등장한다. 옛날처럼 버추얼 파이터와 같은 게임도 있지만 고화질 그래픽과 스토리를 접목한 게임, 스포츠 체험 게임, 4D 게임 등 오감을 자극하는 ‘체험형 게임’들이 주로 눈에 띈다.
특히 가장 놀라운 지점은 인형 뽑기에 부착된 카드 결제 시스템이다. 거스름돈 100원씩 쌈짓돈을 모아 오락실을 찾거나, 저금통을 털어야 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기능이다. 수십 개의 인형 기기 중에는 짱구부터(어느 곳이든 짱구는 무조건 있다), 산리오, 포켓몬 시리즈, 동물 캐릭터, 기발한 콘셉트를 가진 희귀 인형들이 즐비했다. 가방에 다는 인형을 통해 개성을 표출하는 1030세대에게 이제는 인형뽑기 역시 하나의 놀이 문화로 정착해가고 있다.
※ 오락실이 과거보다 대중적인 이미지로 쇄신된 배경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약 4~5년 간격으로 진행하는 ‘게임산업 진흥 중장기 계획’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체부는 지난 2020년 게임산업 진흥 종합계획(2020~2024) 수립을 통해 침체기를 겪고 있는 아케이드게임 산업을 성장시키고, VR과 접목된 실감형 게임 확산과 수출 시장의 강화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이를 통해 오락실을 가족들이 함께 놀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방안을 수립해가기 시작했다.
문화 체험 공간, 팝업 스토어로 변신한 오락실
2020년에 접어들며 MZ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오프라인 매장, 고객경험 공간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오락실 또한 ‘레트로한 체험 공간’으로 변모했다. 일례로 LG전자는 2021년부터 오락실을 콘셉트로 한 체험 공간, ‘금성 오락실’을 선보인 바 있다. 금성 오락실은 LG전자의 TV 제품을 활용해 고화질로 게임을 고성능으로 즐길 수 있는 팝업 스토어로, 게이밍 존, 라이프스타일 체험존, 굿즈 공간 등 복합 문화 체험공간으로 꾸며 ‘색다른 경험’을 중시하는 MZ세대 방문객들을 위주로 높은 수요를 보였다.
지난해 말에는 동대문구에 위치한 상업단지 ‘아트포레스트 청량리’ 건물에 생긴 오락실 ‘청량오락실’도 한차례 화제가 되었다. 아트포레스트 청량리는 복합상업공간 브랜드로, 경동시장을 비롯한 전통시장에 중장년층과 2030세대의 방문객이 높아지며 주목받는 청량리 상권과 역세권이 더해져 일찌감치 핵심 상권으로 거듭난 바 있다. 아트포레스트 청량리는 이곳을 지역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레트로 감성’을 입혔다. 7080콘셉트의 휴게·놀이 시설 ‘청량영화관’, ‘청량오락실’, ‘청량사진관’ 역시 그 일환이다.
‘청량오락실’은 오래된 오락실 풍경을 떠올릴 법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다. 바둑판 무늬의 창문, 고딕체의 문구, 벽에 붙은 옛날 패션잡지 표지사진까지 디테일하다. 현재 이곳은 오락실 문화를 주로 경험한 40~50대 전후의 이용객과, 게임 유튜버나 동호회, 블로거들 ‘오락실 원정’ 차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기자가 이곳을 방문한 평일 오후에도 청량리에 온 2030 커플들이나, 학생들,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게임기의 1회 이용 금액은 대부분 100원으로 책정돼 있다. 청량오락실이 ‘100원 게임’을 내세운 건, 이곳이 수익 창출이 목적이 아닌 고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한 문화 공간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임 요금은 기기 유지·관리, 보수 등으로 쓰이고 있다.
기자 역시 1000원 한 장을 가지고 각종 오락실 게임에 도전했다. ‘다른 그림 찾기’, ‘사격게임’, ‘레이싱카’···. 마지막으로 과거 내가 주력했던 게임 ‘버블보블’로 향했는데, 이날 결국 나는 ‘레벨 5’만 세 번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대체 레벨 6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가벼웠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글 이승연 기자 lee.seungyeon@mk.co.kr][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이승연]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4호(25.01.2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