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된 남자, 살기 위해 구직 경쟁자들을 죽이기로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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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 모호필름 제공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 모호필름 제공

"나는 지금껏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오는 24일 개봉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 원작 소설 <액스(The Ax)>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살인한 적 없다는 당연한 말을 굳이 하는 이유는 '나'가 이제부터는 사람을 죽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왜, 누구를 죽이는 걸까. 그 살인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일까.

<액스>는 미국 범죄소설 대표 작가인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가 1997년 발표한 장편 소설로, 출간 당시 현지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박 감독은 "이 작품만큼 영화화하고 싶었던 미스터리 소설은 없었다"고 했다. 2005년 이미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안내서'로 만들졌고, 영화화 판권을 가브라스 감독이 갖고 있어 리메이크 제작에 난항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책은 올초 판권 재계약 문제로 국내에서 일시 절판됐다가 최근 표지를 갈아입고 새로 출간됐다.

해고된 남자, 살기 위해 구직 경쟁자들을 죽이기로 결심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버크 데보레.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20년 넘게 제지 회사에서 일해온 평범한 중년 남자다. 아내나 두 자녀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회사에서 해고당한 뒤 2년간 실직 상태가 이어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영업자 출신의 제품 생산 중간관리자라는 애매한 경력으로는 재취업이 쉽지 않다. 대출금과 첫째 아이의 전문대 학자금이 목을 조여온다.

궁지에 몰린 데보레는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데보레는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은 넘쳐나고 일자리는 너무 적다." 그는 구직 시장의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데보레의 집 지하실에는 하필 총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전리품으로 남긴 루거 권총이다. 데보레는 경쟁자를 추리기 위해 업계 전문 잡지에 가짜 구인광고까지 낸다. 여기에 속아 보낸 이력서들은 살해 후보 목록이 된 채 데보레의 사서함에 쌓인다.

데보레는 자신에게 위협적인 경쟁자들을 찾아가 총으로 쏴 죽인다. 피해자와 그 주변인물, 경찰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을 속이며 범행을 저지르고 또 숨기는 과정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엉뚱한 오해를 빚기도 한다.

소설 속 주된 범행 도구는 총이다. 총기 소유를 둘러싼 미국의 오랜 고민을 상기시키는 장치로, 소유권과 정의, 자본주의와 폭력, 각자도생 사회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미안하지만 난 반드시 당신을 죽여야 해. 당신이 아니면 내가 죽게 되거든."

소설을 읽다 보면 왜 박 감독이 영화화를 위해 20년 가까이 공을 들였는지 이해가 간다. 속도감 있는 문장과 사건이 몰아치지만 긴장감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연쇄살인 이야기인데도 쾌락적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범죄 과정을 읽어나가다 보면 살인자와 함께 좌절하고 분노하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약 20년 전 나온 소설이지만 컴퓨터 도입과 자동화로 인해 기업마다 '고학력 중년 중간관리직'을 대상으로 대규모 감원이 벌어지는 풍경은 인공지능(AI) 시대에 서늘한 디스토피아처럼 읽힌다. 박 감독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무릇 월급쟁이라면 다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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