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간지럼처럼 느닷없이 찾아온다. 정신은 정착지를 잃은 이주민이 된다. 전례 없던 탄성률을 실험하듯 출구 없는 상자 속을 이리저리 튕긴다. 나는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 지금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든 괜찮다.
그 충동은 특정 감각의 경로로 굴러들어 온다. 제대로 된 청취 환경에서 어떤 음악이 듣고 싶다거나 매일 아침에 마시던 커피의 맛이 어딘가 이상해서 새로운 커피를 맛보고 싶어졌다. 아니면 어떤 것이든 새로운 경관을 눈에 담고 싶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음에도 나는 내게 꾸며낸 경험들 사이에서 진짜를 구별해내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지도를 펼치고 내가 원하는 새로운 곳을 발견한다. 그곳에 간다. 하지만 내가 찾았던 그곳은 거기에 없다. 언제부턴가 공간들이 콘텐츠 같아졌다. 그것을 포장(제목, 섬네일)하고 있는 것과 그 안의 내용물이 다르다.
반복되는 실망이 지루함으로 바뀔 즈음에야 안으로 시선을 돌린다. 어떤 작품의 구조 안에서 그런 공간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날카로운 문장으로 지면 밖으로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작용하는, 어떤 포용력을 지닌, 밖이 아닌 안으로 열린 그런 작품 속에 정착지를 잃은 정신을 위한 은신처가 있을 것이라고. 폴 오스터의 소설 <브루클린 풍자극>에는 실존의 호텔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현실의 삶이 녹록지 않을 때 찾아갈 수 있는 내면의 은신처 같은 곳.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 내면의 은신처를 물리적인 공간으로 만들려 한다. 그렇다. 이 모든 게 어쩌면 공간의 문제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실존하지 못하는 것도, 자꾸만 하나의 표상에서 다른 표상으로 떠돌기만 하는 정신적 이주민이 되는 것도 모두 공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하는 핀란드의 건축가이자 자신의 이름이 붙은 유선형 의자로 유명한 알바 알토는 낙원을 창조하는 것이 건축의 숨겨진 의도라고 말했다. 또한 인간은 평면의 그림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가끔 말해지고 증언되는 어떤 삶은 평면의 종이나 시청각 이미지 속에서 창출된 것처럼 느껴진다. 살아가는 곳을 말하는 데에 있어 주거의 위치, 계약 형태, 평수를 말하는 것이 당연할 뿐만 아니라 정말로 그 광고 속 모델처럼 브랜드를 말하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스스로 일군 삶의 영역이나 공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베란다에 바질과 로즈메리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마트에서 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향을 풍긴다거나 거실 창가에 새로운 안락의자를 하나 두었는데 등받이의 각도, 쿠션의 탄성, 소재가 딱 알맞아서 거기에 파묻혀 몇 시간이고 책을 읽을 수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흔히 북유럽 사람들은 가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의자. 핀란드에 가본 적은 없지만 헬싱키 공항을 경유한 적이 있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지나가게 되는 복도 옆에 마치 가구 쇼룸인 듯한 공간이 있었다. 형태와 색이 아름다운 두터운 쿠션의 의자들이 여유롭게 흩뿌려져 있었다. 거기에 장신의 백인 남성이 다리를 쭉 뻗고 곱슬머리 위로 헤드폰을 쓰고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머릿속에 항상 남아있다.
진정한 브랜드 경험은 공간에서
광고, 브랜딩, 그리고 마케팅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어떤 말이나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엔 결국엔 모두 같다. 어떤 욕망을 일깨우고 나서 (그것이 어떤 아름다운 배우의 용모로 구축된 페르소나이든 전자제품이나 자동차가 창출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어떤 삶이든 간에) 그 일깨운 욕망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경험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꾸며낸 그림 속에, 표상의 세계 속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소비 촉진 행위의 일환인 것이다. 거기에 어떤 단어를 붙이든 결국은 똑같다.
어떤 브랜딩 활동이 진정으로 광고와 달라지려면 광고가 전하지 못하는 감각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감각은 촉각, 후각이 된다. 루이스 칸은 오감 중에 촉각이 가장 첫 번째라고 말했다. 브랜딩은 그 활동이 일깨운 욕망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실체가 있으며 경험 가능한 것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브랜딩 경험을 준 브랜드 중 하나는 크바드라트다. 크바드라트의 광고나 브랜딩을 접한 적은 없지만 그 크바드라트의 원단을 사용한 가구나 스피커를 접하고 나면 그 크바드라트의 브랜드는 손끝과 엉덩이의 촉각으로 남는다. 내게 어느 것도 약조한 적 없지만 이미 그 약속은 실현되었다. 그렇기에 진정한 브랜드 경험은 물리적 공간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경험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쉽게 오히려 경험의 부재를 창출하는 디지털 공간에 붙는다.
다시 <브루클린 풍자극> 속 실존의 호텔로 돌아가서 이 개념을 제시하는 해리라는 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약속의 상징이자 단순한 장소 이상의 장소, 우리가 꿈속에서 살 수 있는 기회이자 가능성을 의미하고 있었오.’ 미셸 푸코 또한 자신이 제시한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반공간이 되는 형태 중 하나로 미국의 모텔을 뽑는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 체크인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들어서고 그 공간은 사용자에게 일시적으로 종속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원했던 시간과 경험을 얻는다. 이것이 실존의 호텔이 이뤄지는 방식이다.
현실에서 어디로 가면 그런 경험을 얻을 수 있을까? 어쩌면 다소 모순적이지만 브랜드 스페이스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곳은 닫혀있는 상태에서 그 브랜드의 사용자 또는 구매 의향이 있는 이에게 열린다. 여기서 이뤄지는 경험은 어떤 평면 안에 머무는 대체 경험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자동차 브랜드가 삶의 가능성을 넓혀준다는 식의 약속을 한다면 그 약속은 실현되기 어렵다. 하지만 운전이라는 행위,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을 약속했다면, 평범한 사용자들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트랙에서의 운전을 경험하는 공간을 구축함으로써 그 브랜드의 약속을 실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약속한 것을 지키는 브랜드, 또 그런 브랜드가 만든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토라야 아카사카점, 그리고 나이토 히로시라는 건축가
이곳은 내부로 들어섰을 때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은 어느 한 점에서 출발한 듯 사선으로 내려와 벽과 계단 등 공간 구석구석까지 이어지는 목재의 정교한 배열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리듬감이다.
앞뒤로 활짝 열리는 덧문들, 차곡차곡 쌓인 기와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리듬감, 또 날카로운 서구식 건물의 그림자와 대비되는 그 경계가 조금씩 흐트러진 듯한 그림자. 동양의 전통적 미가 만들어내는 그런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현대식 구조 위에 덮어 쓰인 외양일 뿐이라면 그 효과는 반감이 된다. 그건 서구의 것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최신의 현대식 공간에 방문했다가 뜬금없는 아치를 만날 때가 많다. 하중을 분산하기 위한 구조였던 아치가 그냥 그렇게 장식으로 활용된다면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나이토 히로시라는 건축가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가장 먼저 부각되는 것은 그가 한 세기 동안 이어질 수 있는 건축의 견고함, 또 지진이 많은 일본의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내구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작품들의 이미지로만 보았을 때는 목재의 활용과 동양의 전통에서 가져온 요소들이 눈에 띄기에 선뜻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설계한 다른 건물인 구사나기 종합 운동장(Kusanagi Sports Complex Gymnasium)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목재 건축물이다. 정교하게 설계된 목재 트러스 구조가 마치 직물처럼 짜여 있어 목재가 지닌 탄성, 유연성이 그 정교한 구조에 의해 세월과 외부 환경을 견딜 수 있는 강성으로 바뀐다. 가공된 목재들의 집합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단지 시각적 아름다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공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구현된 것이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온다.
토라야 아카사카점은 그 내부가 나선형의 구조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듯하다. 1층에서부터 이어지는 계단은 공간을 감싸안듯 휘어져 있고, 안쪽에는 2층과 3층을 연결하는 좁은 나선형 계단이 있다. 주로 넓은 부지 위에 수평적으로 펼쳐진 듯한 그의 다른 공간들과는 매우 다르다. 사무 지구가 밀집된 아카사카 지역임을 고려하여 높게 치솟은 빌딩 숲 사이에서 이곳을 방문하는 순간만큼은 나무들의 배열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리듬 속에서 서서히 오르고 내리며 내외부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라는 의도로 보인다.
아름다운 외부 경관을 자랑하는 공간에 방문했을 때 인기가 많은 자리는 주로 창가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조금 안쪽 자리를 선호한다. 외부의 경관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중첩되며 만들어내는 경관이 더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 내 앞을 지나가면 마치 그 짧은 순간에 어떤 일식 같은 것이 일어난 듯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일렁인다. (국내의 공간 중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카페 테라로사에서 그런 공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나이토 히로시는 개인이 꿈꾸는 삶(protoform)에서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꿈의 경관(protoscape)으로 전환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곳 토라야 아카사카점에서 전통과자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모두 단지 유명한 장소에서의 자신의 시간을 공유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만이 누릴 수 있는 특정한 꿈을 공유하는 듯했다. 거기에는 분명 진정한 경험이 있었다.
기능을 위해 구현된 아름다움, 어쩌면 그것은 좋은 건축 공간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시각으로 전환된 촉각이다. 그 따스한 촉각의 파노라마 속에서 맛보는 미각과 외부의 경관은 덤이다. 메인 요리 뒤에 맛보는 달콤함이다. 단단하지 않은 나무의 질감이 주는 또 하나의 장점은 모든 소리가 부드럽게 품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외국인으로서의 특혜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이토 히로시는 사람들이 경험한 시간과 공간이 응집되어 건축을 살아있게 만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브랜드가 삶을 말하지만 진정으로 삶에 대한 영감을 주는 브랜드는 많지 않다. 빛을 가능한 한 제한하고 완전한 어둠 그 자체를 경험하도록 만드는 설치 미술 작품 속에 들어섰을 때 얻게 되는 새로운 감각이 있고 그런 감각의 차원에서 발견하게 되는 브랜드도 있다. 그런 브랜드가 만든 공간에서는 잠시 일렁이고 마는 일식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를 둘러싼 표상의 세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에 모습을 감추고 진정한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건 돈으로 사는 실존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Living)을 계속해서 우리가 사는 것(Buying)으로 증언할 것이라면 난 이런 공간에 가서, 그곳에서 살 수 있는 그 찰나의 실존을 살 것이다.
박정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