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달라지고 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여행지를 고르고, 인공지능(AI)이 일정을 짜고, 애플리케이션(앱) 하나로 항공권부터 숙소까지 예약이 끝난다. 이처럼 여행 정보 수집부터 예약까지는 쉬워졌지만 정작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건 기술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다. 바로 '함께 가는 것'이다.
10일 스카이스캐너에 따르면 한국인 여행객 대상 설문에서 응답자의 76.2%가 단체 여행 중 구성원 간의 갈등 또는 의견 충돌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가족 여행 금지어 십계명' 같은 글이 공유되고, 여행 총대를 메는 데에 고충을 토로하는 게시물이 공감을 얻고 있다.
여행 계획을 직접 주도해본 경험이 있는 응답자의 82.5%가 '심리적 부담을 느꼈다'고 답할 정도다. 여행의 어느 순간 가장 많이 부딪히는지,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마인드풀니스(마음챙김) 전문가이자 방송인으로 활동 중인 곽정은 작가와 스카이스캐너 여행 전문가 제시카 민과 함께 단체 여행 갈등의 이면과 해소 방법에 대해 들여다봤다.
갈등은 여행지서 시작 아냐…"이미 싹 트여 있어"
"여행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곽 작가는 "갈등의 싹은 이미 트여 있었고,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 싹이 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미 상대를 특정 이미지로 규정해 놓는다. 평소에는 넘어가던 습관이나 말투도 여행이라는 밀도 높은 환경에서는 훨씬 커보인다. 한정된 예산과 시간 속에서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 역시 평소보다 강해진다.
곽 작가는 "여행을 함께 갈 정도라면 대개 가깝고 잘 아는 사이여서 이미 라벨링이 끝난 상태"라며 "뇌는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보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를 재확인하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거봐, 또 저러네'라며 단정 짓게 된다"고 짚었다.
제시카 민은 "여행지에 대해선 마음이 열려 있으면서 정작 동행인에게는 마음이 닫혀 있는 경우가 많다"며 "낯선 골목은 설레면서 탐험하면서, 오랜 친구의 새로운 모습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거나 괜찮아"…'총대'에겐 가장 무서운 말
단체 여행의 갈등은 여행지보다 계획 단계에서 먼저 시작된다. 여행 출발 전 "난 아무거나 괜찮아"라고 말했던 이가 어렵게 예약한 식당에서 "생각보다 별로인 것 같은데?"라는 반응이 나오면 여행을 준비한 사람 마음은 먼저 지친다.
실제 설문 결과 응답자들이 가장 어려움을 느낀 부분은 일정 구성 및 동선 조정(73.1%)과 구성원 의견 조율(63.5%)이었다.
곽 작가는 "여행이야말로 개인의 욕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정된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상황이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해진다"며 "그러다 보면 상대방의 부족한 점이 먼저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가 제안하는 갈등을 줄이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여행 전에 서로의 여행 성향을 먼저 공유하는 것이다. 맛집 탐방이 중요한 사람, 휴식이 중요한 사람, 관광보다 쇼핑을 선호하는 사람은 모두 다르다. 각자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를 먼저 이야기하면 일정 조율은 훨씬 쉬워진다.
'파워J'도 힘든 여행 총대…"책임 과다 바람직하지 않아"
여행을 준비할 때 항공권을 비교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식당을 찾고, 일정을 정리하고, 단체 채팅방을 관리하는 사람을 흔히 '여행 총대'라고 부른다. 앞선 설문에서 응답자의 74%는 한두 명이 여행 계획을 주도한다고 답했다.
자신을 '파워 J'(MBTI 유형 가운데 계획형)라고 밝힌 한 30대 직장인은 "공유 문서에 30분 단위 일정을 짜고 여행 경로 지도부터 일정 브리핑 자료까지 만든 적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여행을 준비하는 수고보다도 '그 수고가 당연하게 여겨질 때'다. 보통은 상대적으로 에너지가 더 있거나 덜 바쁜 사람이, 혹은 부모와 함께 여행을 떠날 경우 자녀가 여행 총대를 맡는 경우가 많다.
곽 작가는 "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전부 책임지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내가 여기까지 알아 왔는데, 이 부분은 네가 잘 고를 것 같다'와 같이 구성원을 자연스럽게 칭찬하면서 조금씩 역할과 지분을 나누고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제시카 민은 "마지막 선택권을 다른 구성원에게 넘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며 "선택권을 부여하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감을 갖게 되기 때문에 성향이 다른 동행인 간 불만이 줄어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
부모님과의 여행, "한국이 더 나은데"의 진짜 의미
가장 부담스러운 여행 동행인을 묻는 말에 응답자의 49%는 부모님을 꼽았다. 잘하고 싶어 숙소를 몇 번이나 비교하고 이동 동선의 계단과 언덕까지 확인했는데도 돌아오는 반응은 뜻밖인 경우가 있다. 가령 "왜 이렇게 비싸냐" 같은 말에 자녀 입장에선 힘이 빠진다.
곽 작가는 "부모님 세대는 돈을 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세대"라며 "자식이 돈을 쓰는 것이 미안하고, 늘 이끌던 존재였는데 어느 순간 따라가는 위치가 된 것에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여기가 별로다', '한국이 더 낫다'는 말도 표현 방식이 다를 뿐, 결국은 자식을 위하는 마음과 미안함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고 부연했다.
부모님과 함께 가는 여행에서는 좋은 호텔보다 체력 관리가 중요할 때가 많다. 이동 거리와 숙소 위치, 계단과 언덕 여부, 비행 일정 등을 꼼꼼히 살피는 것이 만족도를 높이는 지름길이다.
곽 작가는 "부모님이 처음으로 이 세상을 여행시켜 준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예산 갈등은 가치관 문제…"원칙 미리 정해야"
여행 예산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응답자들은 당초 계획보다 평균 15.6%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고 답했다. "피로를 느낀 동행인 때문에 계획에 없던 택시를 타게 됐다", "항공권과 숙소 중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달라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경험담도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여행에서의 예산 갈등을 단순한 돈 문제로 보지 않는다. 누군가는 숙소에 돈을 쓰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음식에, 또 다른 누군가는 쇼핑에 더 큰 가치를 둔다. 결국 충돌하는 것은 금액이 아니라 우선순위다.
곽 작가는 "여행 전 예비비를 별도로 확보하고, 무엇에는 돈을 아끼지 않을지 미리 합의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며칠에 한 번씩 정산한다는 원칙을 정해두는 것만으로도 현지에서의 갈등은 크게 줄어든다.
갈등이 폭발하기 직전이라면
여행 중 이미 감정이 상한 상태라면 감정을 쏟아내기보다 관계를 먼저 지키는 접근을 권한다. 상대방 역시 여행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곽 작가는 "상대가 먹고 싶어 했던 음식을 함께 먹는 등 먼저 자세를 낮춰보는 것도 방법"이라며 "'내가 이 부분에서 조금 예민해졌는데, 너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으니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너 때문에 화가 났어'보다 '나는 조금 속상했고, 이 부분을 배려받고 싶어'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좋은 여행은 함께 떠난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고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경험에 가깝다.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일만큼이나, 곁에 있는 사람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곽 작가는 이를 마인드풀니스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고, 동행인에게도 '지금 어때?'라고 물어봐 달라. 그 단순한 행동이 마음을 현재로 불러온다"고 강조했다.
신용현 한경닷컴 기자 yong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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