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한국수력원자력이 따낸 26조원 규모 체코 원전수출 계약이 최소 6~8주, 길게는 내년 이후까지 연기될 가능성이 커졌다. 체코 법원이 이 결과에 불복한 프랑스 경쟁사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여 소송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계약을 하지 못하도록 가처분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계약 하루 전날 계약중지 가처분 명령
6일(현지시간) 체코 현지 언론 CTK통신과 로이터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체코 부르노 지방법원은 이날 체코 두코바니 원전 5·6호기 사업 발주사인 체코전력공사의 자회사 EDUⅡ와 이 사업을 맡아 수행할 예정인 한수원의 계약 체결 중지 가처분 명령을 내렸다. 7일(현지시간)로 예정된 계약 체결식 하루 전에 이뤄진 결정이다. 한수원 관계자 역시 “현재 계약이 불투명한 상황이며 발주사와 이와 관련해 협의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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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2022년 10월27일(현지시간) 체코 프라하 주체코 한국 대사관 접견실에서 페트르 피알라 체코 총리와 면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산업부) |
한수원의 경쟁자이던 프랑스전력공사(EDF)의 이의제기가 가져온 결과다. 한수원은 지난해 7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며 이번 사업 수주의 9부 능선을 넘었다. 최대 걸림돌로 예상됐던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적재산권 분쟁 문제도 올 1월 양측간 협약을 통해 해소했다.
그러나 신규 원전 사업을 놓친 EDF의 반발은 집요했다. 지난해 10월 체코의 공정거래위원회 격인 UOHS에 공정한 입찰이 아니었다며 이의를 제기하며 조사 중 본계약 체결을 막는 조치를 이끌어냈고, 이는 올 3월로 예정됐던 본계약이 늦어지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UOHS가 지난달 24일 이의제기를 최종 기각하며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체코 정부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각료회의에서 신규 원전 건설 예산안을 승인하고 5월7일(현지시간)이란 본계약 체결 일자도 확정했다. 당연히 한국 정부와 한수원도 발주사 측이 제시한 일정에 맞춰 이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EDF는 이달 2일 UOHS의 결정이 부당하다며 체코 부르노 지방법원에 행정소송을 냈다. 체코 정부와 EDUⅡ, 한수원도 이 사실을 인지했으나 계약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작다고 본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한국·체코 모두 EDF에 허를 찔린 셈이 됐다. 체코 법원은 “이번 계약이 이뤄지면 EDF는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계약을 따낼 기회를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설명했다.
체코 총리 “법원 신속 최종 결정 기대”
한국 정부·업계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 등 업계 관계자는 현지에서 서명식을 준비해 왔고,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등 대통령 특사단은 사상 초유의 ‘대대대행 체제’ 중에도 현지 서명식에 참석하기 위해 현지를 찾은 참이었다. 모처럼 여야가 함께 6명의 국회의원으로 이뤄진 특별방문단을 꾸려 이번 계약을 축하하기로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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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두코바니 원전 1~4호기. (사진=체코전력공사 홈페이지) |
그러나 이들은 페트르 피알라 체코 총리 등과 경제협력 확대 논의 등 기존 일정을 모두 뒤로하고 상황 파악과 향후 계획 수립에 나서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번 계약과 관련한 모든 정부 관계자는 체코 법원의 가처분 명령 발표 당시 체코행 비행기에 탑승 중이었기에 체코에 도착해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주요 인사 대부분은 곧바로 귀국할 예정으로 전해졌다.
체코 측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EDUⅡ는 체코 법원의 가처분 명령에 반발해 현지 언론을 통해 이번 소송 결과에 따라 EDF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페트르 총리는 X 계정을 통해 “입찰 절차는 법률에 따라 올바르게 진행됐다”며 “법원이 신속히 최종 결정을 내릴 것으로 믿는다”고 전했다.
한-체코 간 계약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체코 정부나 발주사는 현지 언론 등을 통해 한수원과의 계약 추진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EDF가 문제 삼는 입찰 불공정성 가능성 역시 체코의 공정위가 ‘문제없다’고 결론 낸 사안이다. 체코 법원 역시 현지 언론을 통해 이번 가처분 명령은 절차적 조치일 뿐 소송의 결과와는 무관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일정 지연은 불가피하다. 체코 언론은 현지 유력 전문가를 인용해 EDF를 포함한 모든 분쟁 당사자가 협조한다면 체코 법원도 6~8주 안에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정식 소송 땐 6~8개월까지 걸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내년이 돼서야 계약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29년 착공해 2037년 완공한다는 기존 계획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더욱이 양국 모두 눈앞에 대형 정치 이벤트가 펼쳐질 예정이다. 한국은 6월3일 조기 대선에서 새 정부가 출범할 예정이다. 체코 정부 역시 10월 선거 결과에 따라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이 있다. 둘 중 한 정부가 비용 등을 문제 삼아 새 정부가 계약을 재검토하겠다고 나선다면 계약 시점은 더 늦어질 수 있다. 뒤늦게나마 계약이 이뤄지더라도 계약식에 참여하는 인사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