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을 사랑한 런던의 화가 헬러만, 9m 벽에 그려낸 '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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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언제나 함께여야 완성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일상화되고 언제 어디서든 서로 연결할 수 있는 초연결 사회라 해도, 축제는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해야 진행할 수 있다. 일상의 경계에서 잠시 벗어난 이 시간에는 생생한 감정과 공동체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 때문일까. 화가들은 오래전부터 축제의 장면을 그려 왔다. 멕시코의 국민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는 멕시코 전통 축제를 대형 벽화로 생생히 구현했고, 색채의 마술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은 서커스와 결혼식, 음악 축제의 장면을 몽환적인 이미지로 승화했다.

의식, 2025, Acrylic on canvas, 180 x 230cm. /스페이스K

의식, 2025, Acrylic on canvas, 180 x 230cm. /스페이스K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소피 폰 헬러만(Sophie von Hellermann)은 한국의 전통 명절 ‘단오’가 만들어내는 모습을 캔버스에 옮겼다. 서울 마곡 스페이스K에서 20여 점의 신작 회화와 대형 벽화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의 개인전 ‘축제’가 진행된다.

모든 생애가 축제의 시간
이번 전시에서 소피는 단오를 비롯한 축제의 풍경과 한국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작가는 그간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문화를 접했다. 한국-독일 혼혈인 친구 어머니에게 들은 탈춤 이야기부터 그가 가르치는 한국 학생들과의 교류, 한국 영화와 한국 문학 작품 등은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평소 글쓰기와 소설,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이청준의 소설 <축제>와 김소월의 <진달래꽃>, <춘향전> 등의 문학은 작업에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 영감받은 작품 진달래꽃. 연분홍빛의 진달래꽃과 달리 작가는 노란색으로 사랑의 상실을 표현했다. 진달래꽃, 2025, Acrylic on canvas, 110 x 90 cm /스페이스K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 영감받은 작품 진달래꽃. 연분홍빛의 진달래꽃과 달리 작가는 노란색으로 사랑의 상실을 표현했다. 진달래꽃, 2025, Acrylic on canvas, 110 x 90 cm /스페이스K

몽룡이 춘향에게 큐피드의 화살을 쏘는 듯 표현한 작품 '몽룡', 2025, Acrylic on canvas, 140 x 160cm. 이 작품은 폭포수가 쏟아지는 모습의 벽화와 어우러져 전시된다.  /스페이스K

몽룡이 춘향에게 큐피드의 화살을 쏘는 듯 표현한 작품 '몽룡', 2025, Acrylic on canvas, 140 x 160cm. 이 작품은 폭포수가 쏟아지는 모습의 벽화와 어우러져 전시된다. /스페이스K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오가 되면 우리 조상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탔다. 떡이나 전 등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서로의 안녕을 비는 이 행사에서 소피는 영국 축제 ‘메이데이(May Day)’의 정서를 떠올렸다. 계절의 변화를 축복하고 여럿이 모여 한 해의 건강과 풍요를 기원한다는 점에서 깊은 연결고리를 느낀 것이다. 언제나 축제를 ‘무언가를 기념하는 시간’으로 여겨온 작가는 이번 전시가 자신의 생일 직후에 열리는 점에도 의미를 담았다. 그는 전시 전체가 삶을 축복하고 기념하는 자리로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작업에 임했다.

탈춤, 2025, Acrylic on canvas, 180 x 230cm. /스페이스K

탈춤, 2025, Acrylic on canvas, 180 x 230cm. /스페이스K

작가의 초창기 작품을 기억하는 관람자라면 이번 전시에서 색감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주로 파스텔톤이나 회색빛의 물감을 주로 사용해 온 그지만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채도가 높은 빨강, 파랑, 초록, 노랑 등 강렬한 원색이 주를 이룬다. 한국 전통 오방색과 태극기, 한복, 단오날 입는 전통 의상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된 변화다. 보다 다양한 색을 활용해 스펙트럼이 넓어진 작가의 색채를 확인할 수 있다.

소피의 세계에 변화가 반영된 지점은 또 있다. 작가는 그간 광활한 공간 속에서 고독한 인물을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점차 모여있는 사람들과 그 안팎으로 일어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제는 단순히 한 인물과 장대한 풍경을 그리기보다는 공간을 더 다채롭게 활용하며 실험하고 여러 인물이 어우러진 장면을 더 많이 그리게 됐다”고 전했다.

단오, Acrylic on canvas, 256 x 352cm. /스페이스K

단오, Acrylic on canvas, 256 x 352cm. /스페이스K

벽에 아로새긴 자연 향한 찬미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스페이스K 전체를 에워싼 벽화다. 갤러리 내부로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부터 동화 속에 들어선 듯한 인상을 준다. 9m가 넘는 높이의 벽에 비와 눈, 햇빛, 불과 같은 자연 현상을 그려 인물과 자연이 교감하는 축제의 풍경이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소피는 그간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성격의 대형 벽화 작업을 전개해 왔다. 지난해 독일 베를린의 브뤼케 뮤지엄(Brücke-Museum)에서 8명의 수집가의 삶과 개성을 하나로 아우르는 벽화 작업을 진행했고, 올해 초 영국 런던에서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필라 코리아스(Pilar Corrias) 갤러리 벽면을 수놓았다. 이번에 선보이는 벽화는 작가가 지금까지 진행해 온 벽화 작업 중 역대 최대 규모다.

한국 문학을 사랑한 런던의 화가 헬러만, 9m 벽에 그려낸 '단오'

이 거대한 벽화를 감상하다 보면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다양한 요소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소피는 작업을 지켜보던 관계자들을 바라보는 듯 태풍 한가운데 눈을 그려 넣기도 했고, 자신의 별자리인 양자리도 벽면 어딘가에 숨겨놓았다. 도토리묵을 처음 맛본 날에는 거대한 떡갈나무를 그렸으며, 한국 전통화에 주로 등장하는 소와 돼지, 닭 등의 동물들도 곳곳에 등장한다.

(왼쪽) 벽화의 거대한 태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피가 그려놓은 '눈'을 찾을 수 있다. (오른쪽) 작은 강이 흘러 바다로 가는 것처럼 벽화의 시작점이 된 부분. /강은영 기자

(왼쪽) 벽화의 거대한 태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피가 그려놓은 '눈'을 찾을 수 있다. (오른쪽) 작은 강이 흘러 바다로 가는 것처럼 벽화의 시작점이 된 부분. /강은영 기자

작가는 오래 전부터 자연에서 유래한 안료를 사용해 왔다. 인간이 자연, 동물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그 바탕에 있다. 그는 미술 학교에서 배운 전통 방식을 활용해 기름 대신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며, 이 물감이 굳지 않게 항상 같은 물감통에 물을 부어 재사용하고 있다. 다 쓴 물감을 하수구에 흘려보내는 것이 자연에 해가 될까 싶어서다. 작은 행동이지만 자연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신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전시는 7월 6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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