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는 성공과 실패의 수많은 패턴을 발견했다. 비록 이 책에서 ‘성공의 절대 공식’은 등장하지 않지만 내가 찾아낸 성공의 패턴을 (꾸밈없이) 공유한다.”
오늘날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핫’한 인물은 누구일까. 페이팔과 팰런티어를 설립하며 화려한 스타트업 신화를 썼고, 페이스북과 스페이스엑스를 비롯한 수백개의 스타트업에 투자자로 참여하는 등 ‘황금 감식안’을 뽐낸 인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대선 출마의 초석을 닦고, J.D 밴스 부통령을 정치 거물로 이끈 피터 틸 팰런티어 테크놀로지 회장이 단연 첫손에 꼽힐 것이다.
틸 회장이 자신의 도전 경험과 성공비결을 곱씹으며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유일한 책이 <제로 투 원>(한국경제신문)이다. 세계적으로 100만부 넘게 팔리며 ‘스타트업계의 바이블’로 불린 이 책이 국내에 소개(2014년)된 지도 10년이 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대격변이 이어지는 첨단 기술 전쟁의 시대에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100년을 내다보는 틸 회장의 안목은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이 현대 경영의 고전은 오늘날에도 제2의 구글, 제2의 애플, 제2의 페이스북을 꿈꾸는 스타트업 기업인들에게 여전히 끝없는 영감을 주고 있다. 10주년 기념판을 새로 선보인 시점에서도 이 책은 도전하는 기업인의 열정을 북돋우고, 경쟁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주의를 주며, 사업의 본질에서 한눈팔아선 안된다는 서늘한 경고를 전한다.
책이 전하는 가장 큰 매력은 ‘살아있는 신화’가 주는 경외감과 생동감이다. 낡은 역사책 속에 박제된 과거의 인물이 아닌, 같은 시대를 호흡하는 인물들의 성공담이 바로 옆에서 대화를 하는 것처럼 피부에 와닿는다.
틸 회장은 자신이 최초로 만들었던 팀이 실리콘밸리에서 ‘페이팔 마피아’로 불린다고 자부한다. 초기 멤버들이 성공적인 기술 기업을 창업하거나 투자할 때 자기 일처럼 서로 도움을 주기 때문. ‘경영인 명예의 전당’이라 할 만큼 ‘페이팔 마피아’의 명단은 화려하다. 2002년 15억달러를 받고 페이팔을 이베이에 매각한 이후, 일론 머스크는 스페이스엑스를 설립하고 테슬라를 세웠다. 리드 호프먼은 링크트인의 공동설립자이며 스티브 첸과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은 유튜브를 만들었다. 그리고 틸 회장은 팰런티어를 공동으로 설립하며 스타트업 신화를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써 내려가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것. 정치인에게 ‘별의 순간’이 단 한 번 다가오듯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순간’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제2의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들어서 제2의 빌 게이츠가 될 수도, 검색엔진을 만들어서 제2의 레리 페이지나 세르게이 브린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을 베끼려 하다가는 정작 이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순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새로운 창조와 도약을 이루는 일이다. 기존의 모형을 모방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기껏 잘해봤자 1에서 n이 되는, 익숙한 것이 하나 더 늘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그것은 0에서 1이 된다. 한 개의 타자기를 보고 100개의 타자기를 만들었다면 ‘수평적 진보’ ‘확장적 진보’를 이룬 것이지만 한 개의 타자기를 본 다음 워드프로세서를 만들었다면 ‘수직적 진보’ ‘집중적 진보’를 이뤘다는 얘기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0에서 1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창조’가 사업에서 꼭 필수적인 필요는 없지 않을까. 틸 회장은 ‘창조’가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강조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어려운 과제에 투자하지 않으면, 기업은 지금 아무리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만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그런 ‘창조’의 과정이 끊임없이 시험받고 검증받는 장소가 미국이다. ‘자본주의의 본산’, ‘기업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도 회사 하나가 성공하려면 수백~수천개의 기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기적은 주어지는 것.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틸 회장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기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이 기적을 ‘기술’이라고 부른다. 기술이 기적인 이유는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일을 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기술은 어떻게 등장하는 것일까. 역사가 흐른다고 새로운 기술이 저절로 나타난 적은 없다. 기술의 진보가 이뤄진 분야도 극소수다. 20세기 중반 이후 극적인 개선을 이룬 분야는 컴퓨터와 통신뿐이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기술을 선보인 주체는 대개 새로운 벤처기업, 스타트업이었다.
하지만 이들 벤처기업, 스타트업들은 시행착오라는 태생적 한계를 피해 가기 힘들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닷컴버블이었다. 닷컴 열풍은 강렬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다 함께 제정신이 아니었던 기간은 1998년 9월부터 2000년 3월까지 18개월로 짧았다. 하지만 그 기간에, 기업들은 자신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들은 열풍이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기업이 성장할수록 돈을 잃는 ‘반(反)사업적 사업 모형’을 채용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닷컴이 붕괴된 후 스타트업들에 주어진 교훈은 소박했지만, 준엄했다. ‘점진적 발전을 이뤄라.’ ‘가벼운 몸집에 유연한 조직을 유지하라.’ ‘경쟁자보다 조금 더 잘하라,’ ‘판매가 아니라 제품에 초점을 맞춰라.’는 규율은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대지 말고, 세계를 바꾸고 시대를 이끌 기업이 처음부터 가져야 할 덕목을 간명하게 전한다. 기업이 가치가 있으려면 앞으로 성장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회사가 존속해야’ 한다는 기본도 강조한다. ‘단기 성장’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
그렇다고 스타트업이 몸을 사리기만 하고, 야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틸 회장은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에게 있어 비즈니스에서 균형이란 정체를 뜻하고 정체는 곧 죽음일 뿐이다, 어느 산업이 경쟁적으로 균형 상태에 도달했다면, 그 산업에 속한 어느 기업이 사라진다고 해도 세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는 기업과 구분이 되지 않는 또 다른 경쟁자가 그 기업의 자리를 대신할 테니 말이다.
스타트업이 존속도 고려하면서, 야성도 유지해야 한다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주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틸 회장은 이에 대한 해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우선 너무 작다 싶을 만큼 작게 시작하라는 것. 큰 시장보다는 작은 시장을 지배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신생기업에 완벽한 표적 시장은 경쟁자가 없거나 아주 적으면서도 특정한 사람들이 작은 규모로 모여 있는 시장이다. 시장이 크다면 어느 분야에서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거나 경쟁에 노출되어 있어 조금의 발전을 이루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힘들게 발판을 마련한다고 해도 회사 문을 닫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수도 있다. 치열한 경쟁은 곧 이윤이 0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스타트업들은 틈새시장을 만들고, 이를 지배하게 되면 관련 있는 좀 더 넓은 시장으로 서서히 사업을 확장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스타트업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창조적 파괴’에 대한 강박이다. 틸 회장은 실리콘밸리가 파괴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다고 꼬집는다. 파괴적 혁신은 하나의 유행어가 됐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파괴적 혁신’이라는 개념은 기존 회사들에 대한 위협을 묘사하려고 만든 말이다. 신생기업이 파괴에 집착한다면, 이는 구식 회사들의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보겠다는 뜻에 불과하다고 틸 회장은 예리하게 파고든다.
스타트업 세계에선 통상의 상식도 통하지 않고는 한다. 선발자의 이득에 대한 관념이 대표적이다. 먼저 움직이는 것은 하나의 전략일 뿐 목표가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미래의 현금 흐름을 창출하는 것이다. 누군가 따라와서 1위 자리를 빼앗는다면 퍼스트 무버가 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라스트 무버’가 되라는 조언이다.
이들 성공 법칙을 구현한 구체적인 성공사례로 지목되는 것이 테슬라다. 테슬라는 다른 회사가 의지할 만큼 훌륭한 기술 보유했으며 때도 잘 만났다. 2009년은 정부가 청정기술 기업이 계속해서 지원받던 시기였다. 테슬라는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하위 시장, 즉 고가의 전기차 스포츠카 시장에서 독점을 이뤘다. 사람 측면에서도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는 완벽한 공학자인 동시에 세일즈맨이다. 다른 자동차 회사와 달리 유통체인도 직접 소유했다. 다른 자동차 회사는 독립 대리점의 신세를 지는 구조를 깨부쉈다. 그리고 선발주자이면서도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테슬라는 ‘누가 운전하든 상관없이 운전자를 근사하게 보이게 만들 차를 만든다’는 핵심 비기도 갖췄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운에 대한 시각이다. 틸 회장은 역설적으로 ‘나의 운은 내가 만들어 나간다’는 과거의 태도로 돌아갈 것을 주문한다. 르네상스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운이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으며, 통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생이 대부분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면 이 책을 읽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틸 회장은 일갈한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면 창업에 관해 배우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면서….
그는 언제나 과거 시제로 사용되는 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미래에 관한 질문이라고 강조한다. 신생기업을 성공시키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을 완벽하게 손안에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선 우연이라는 불공평한 폭군부터 거부해야 한다. 스타트업은 복권이 아니다. 운에 기대지 말라는 외침은 울림이 적지 않다. 그에게 있어 미래는 우연이 아닌 디자인 하는 대상이다.
이와 함께 책은 스타트업들이 비슷한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구성될 때 성공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언급한다. 처음부터 실제로 즐겁게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채용해야 한다는 것. 페이팔 공동 창업자인 맥스 레브친이 신생기업은 개인적으로 최대한 비슷한 사람들로 초기 직원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목소리를 실감나게 전한다. 신생기업은 자원이 제한돼 있고 팀의 크기가 작기에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면 그렇게 하기 쉬울 것이란 설명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외부에 어떻게 보이는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새로 고용하는 사람들 역시 모두 일에 똑같이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스타트업을 이끄는 기업가라면 극도로 헌신적인 문화, 광신 집단처럼 보이는 문화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문이다.
인공지능(AI) 열풍이 거센 요즘, 인간과 기계와의 관계를 바라보는 그의 탁견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에게 있어 기술과 인간은 상호 보완적 존재다. 사람과 기계는 서로 잘하는 일이 다르다. 사람에게는 의도가 있어 계획을 세우고 복잡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린다. 반면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일은 잘 못 한다. 컴퓨터는 이와 정반대다. 단지 원론적인 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실제 기업 경영에도 인간과 기계 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다. 틸 회장이 페이팔을 운영하던 초기에 신용카드 사기로 매달 1000만달러 이상 손실을 봤다. 자동 소프트웨어로 대응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대응으로 잘 디자인된 유저 인터페이스상에서 컴퓨터가 가장 의심스러운 거래를 적발하면 사람 운영자가 그 적법성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도록 했다. 기계와 인간의 복합 시스템을 구축한 뒤 회사는 사기꾼의 공습을 이겨내고 흑자로 전환했다.
틸 회장은 페이팔에서의 성공에 멈추지 않았다. 인간과 기계 공생 관계를 이용하면 테러리스트 연락망과 금융사기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2004년 팰런티어를 설립했다. 사람들이 다양한 정보의 원천으로부터 어떤 통찰을 뽑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조’한 것이다. “인간의 지능도, 컴퓨터의 지능도 혼자서는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없다”는 말은 이후 그의 업적을 통해 더욱 힘을 얻는다.
틸 회장은 “시간이 흐른다고 미래가 되지는 않는다”고 화두를 제시한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아무것도 없거나 무언가가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얘기다.
10년 만에 다시 편 책에서 전해지는 전율은 10년 전 느꼈던 것처럼 여전히 생생하다.
김동욱 한경BP 편집주간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