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가 보이는 요양원. 각자 자기 인생이 녹아든 시를 쓰는 노인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의 애순(문소리)은 파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고 스케치북 한가득 바다의 색깔을 칠했다. 이때 흐르는 음악은 비틀스의 '예스터데이'.
#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순간. 먼저 세상을 떠났던 며느리 광례(염혜란)가 찾아와 '소풍이었냐, 고행이었냐' 물었다.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고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산 적이 없었던 춘옥(나문희)은 "내 자식들 다 만나고 가는 기가 막힌 소풍이었다"며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정미조의 '귀로'가 흘러나와 먹먹함을 안겼다.
1950년대 제주도에서 태어난 애순의 일대를 그린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는 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인생 드라마'로 자리 잡았다. 문학소녀를 꿈꾸던 어린 애순과 묵묵히 그의 곁을 지키는 무쇠 소년 관식의 풋풋하고 뭉근한 설렘부터, 풍파를 겪으면서도 두 손을 꼭 잡고 온기를 나누는 부부, 재가 될 정도로 활활 타오른 뒤 온기를 품에 간직한 채 스러지는 인생의 흐름을 사계절에 빗대어 풀어냈다.
에피소드가 공개될 때마다 "오늘도 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실제 우리네 인생이 그러하듯 너무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애순과 관식의 삶을 그려낸 '폭싹 속았수다'를 두고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마냥 슬퍼서 우는 게 아닌, 공감과 향수가 느껴져 눈물이 절로 흐른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큰 역할을 해낸 요소 중 하나로 '음악'이 꼽혔다.
◆ 발매 음원 85곡·삽입곡 82곡…"세 편의 작품처럼 작업"
'폭싹 속았수다'의 음악은 그간 드라마 '미생'·'시그널'·'나의 아저씨'·'이태원 클라쓰' 등을 작업했던 박성일 음악감독이 책임졌다. 최근 경기 고양시 덕은동에 위치한 호기심 스튜디오에서 만난 박 음악감독은 "'폭싹 속았수다'는 저와 이미 12월 초에 헤어진 작품"이라면서도 "연락을 많이 받아서 사람들에게 좋은 작품이 됐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대본을 읽고 1부부터 울었다는 그는 "김원석 감독님과 '이 작품이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그 과정을 지나서 누군가를 응원하는 따뜻한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음악 작업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10개월이었다.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음원으로 새로 발매된 트랙만 85곡인데다, 시대를 반영한 삽입곡도 가요 59곡·팝송 4곡·민요 3곡·클래식 5곡·라디오 시그널 및 CM송·만화주제가까지 무려 82곡이 쓰였다.
박 음악감독은 "10개월 동안 죽을 뻔했다. 시대적 배경이 60년대, 90년대, 그리고 현재까지 크게 3개다. 음악의 종류나 개수가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다. 제작비가 비싼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니라 마치 세 편의 작품처럼 접근해야 했다"면서 "작업한 곡은 OST 앨범에 실리지 못한 것까지 더하면 100곡이 넘을 거다. 굉장히 허들이 높은 작품이었다"고 털어놨다.
◆ "비틀스 곡 사용,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음악 팬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가 된 건 비틀스 '예스터데이'의 삽입이었다. 비틀스의 음악은 저작권료가 비싼 것은 물론이고, 사용하기 위한 절차도 전 세계 모든 곡을 통틀어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폭싹 속았수다' 첫 화와 마지막 화 두 차례에 걸쳐 '예스터데이'가 흘러나왔다.
박 음악감독은 "처음부터 대본에 '예스터데이'가 들어가 있었다"면서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금액만의 문제가 아니라 명분이 없으면 가차 없이 거절당하기 때문에 비틀스의 음악은 섣불리 도전을 못 하는 상징성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예스터데이'를 대체할 수 있는 후보군도 엄청나게 고민해봤지만, 이보다 나은 선택이 없더라. 한국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 장면에서 '예스터데이'가 쓰이는 것에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도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오프닝 곡으로 김정미의 '봄'이 사용됐고, 남인수 '감격시대'·산울림 '너의 의미'·'아니 벌써'·김추자 '소문났네'·장덕 '애얘'·김연자 '아침의 나라에서'·조용필 '단발머리'·심수봉 '사랑밖에 난 몰라'·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이치현과 벗님들 '당신만이'·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정미조 '귀로'·H.O.T. '행복'·코나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김수희 '애모'·김광석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임영웅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등 폭넓은 시대를 아우르는 곡들이 삽입됐다.
박 음악감독은 "아주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지점을 찾으려고 했다.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게 쉽진 않았는데 김원석 감독님이 작품과 결이 맞는 곡을 많이 정해둔 상태였다"면서 "오히려 초반에는 곡을 빼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딱 필요한 자리에만 곡이 들어간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춘옥이 세상을 떠나는 장면에서 나오는 정미조의 '귀로'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해당 장면에는 당초 다른 곡이 들어가 있었으나, 박 음악감독이 '귀로'로 바꾼 것이었다. 심지어 원곡자인 정미조에게 직접 재녹음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박 음악감독은 "'귀로'의 가사가 장면과 딱 잘 맞아떨어졌다. 다만 원곡보다 훨씬 차분한 감정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실례인 걸 알면서도 원곡자에게 다시 노래해달라고 했다. 리메이크하면 쉬웠겠지만, 원곡의 정서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면서 "그 한 장면을 위해 키를 내려서 부탁했는데 선생님이 취지를 이해해 줬다"며 고마워했다.
◆ "최백호 '희망의 나라로', 블록버스터급 제작"
삽입곡들이 화제성을 견인했다면, 작품의 몰입도를 높이고 완성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건 직접 제작한 OST였다. 가창곡 외에 스코어(연주곡)까지 '폭싹 속았수다'의 성격을 제대로 반영한 명곡이 대거 탄생했다.
'낭만 가객' 최백호가 부른 '희망의 나라로'는 작품을 대표하는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거칠게 힘껏 내리치는 피아노 연주로 시작해 투박한 드럼 사운드, 깊고 진한 최백호의 목소리, 구슬픈 만돌린 선율까지 듣자마자 단숨에 옛 감성에 빠져든다. 소리에 대한 강한 신념과 노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박 음악감독은 "필름 카메라로 찍은 걸 아무리 디지털로 구현하려고 해도 안 되지 않나. 소리도 그렇다"면서 "그 당시에 쓰던 장비·악기를 공수해 과거 기술을 재현하고 복각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작업했다. 한국에서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폴 매카트니가 사용하던 브랜드의 베이스를 찾았고, 만돌린도 구매했다. 또 요즘엔 드럼에 15개 이상의 마이크를 쓰는데 이건 딱 4개만 썼다"고 밝혔다.
이어 "'희망의 나라로'는 '폭싹 속았수다' 작업을 하기로 하고 제일 먼저 쓴 곡이다. 블록버스터 음원이자 끝장판"이라며 웃었다.
추다혜가 부른 '청춘가'도 피와 땀이 서린 결과물이다. 도입부에 흐르는 거문고 소리가 흥을 북돋고, 후렴으로 치달으면서 민요 록밴드 씽씽의 보컬인 추다혜의 격정적이면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나와 가슴을 찌른다. 퓨전국악 스타일의 곡으로 한국적인 매력과 신선함을 동시에 잡았다. 박 음악감독은 "디스코를 썼는데 그런 복고풍 디스코를 부르는 가수가 없었다"면서 "추다혜 씨를 생각하고 쓴 곡도 아니었는데, 녹음하는 걸 보니 물 만난 물고기더라. 오히려 그녀를 고려하지 않고 썼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음악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OST에는 프라하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가 연주로 참여했다. 여기에 잠비나이 심은용이 거문고, 안은경 국립국악원 악장이 피리·태평소 소리를 더했다. 박 음악감독은 "1960년대를 음악적으로 표현할 때 국악기가 어느 정도 사용됐으면 좋겠다는 김 감독님의 의견이 있었다. 국악기를 사용하되 국악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국악기를 거의 양악기처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통음악이 아닌 퓨전이지 않나. 심은용, 안은경 두 분은 국악기를 국악에 한정되어서 사용하는 분들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떠올랐다"고 덧붙였다.
◆ "영상 음악도 돌비 애트모스로…OST 제작 고도화"
박 음악감독은 "OST 시장이 10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추구한다. 소위 허투루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폭싹 속았수다'로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음악을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로 구현해낸 것. 음악을 다 만들고 믹싱까지 마친 뒤에 서라운드 믹싱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는 식이었다. 박 음악감독은 "서라운드 환경으로 다시 믹싱하고, 편집하고, 그에 대해 수정 대응하는 과정이 추가됐다. 한국 드라마 16편이 아니라 영화 16편처럼 공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고화질의 영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단 몇 년 안에 이루어졌듯, 영상 음악 또한 고도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층 풍족하게 즐기려는 추세가 곧 다가올 거라는 박 음악감독의 혜안에서 비롯된 도전이었다. 콘텐츠 소비가 여가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질 좋은 시청 환경을 추구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는 가운데 이는 유의미한 첫 단추가 될 전망이다.
박 음악감독은 "관식이와 금명이가 유채꽃밭 한복판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의 경우 알게 모르게 풀벌레 소리 등의 레이어가 많고, 감정을 위해 음악을 어디 배치하느냐도 중요해진다. 두 사람이 폭풍 속에서 동명이를 찾아다닐 때도 간판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지 않나. 이런 소리를 앞과 위에 장치하면 음악은 자연스럽게 체중이 뒤로 간다"면서 반구 형태 안에서 입체적으로 꽉 채워 들어오는 사운드의 매력을 느껴보길 바랐다.
어느덧 작곡가로서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고, 영상 음악 활동도 15년을 해왔다. 박 음악감독은 "작품을 볼 때는 우리의 음악이 안 들렸으면 좋겠다. 음악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봤으면 한다. 그만큼 감정의 농도가 짙고 세밀하게 표현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라면서 "그렇게 되면 역으로 나중에 음악의 전주만 들어도 그 장면이 떠오르게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을 짝사랑한다"는 표현을 썼다. "예전에는 10번, 20번 고민하고 곡을 발전시켰다면 지금은 100번, 200번 고민하는 것 같아요. 제 마음에서 100점을 받기가 굉장히 힘든데, 적어도 자체 검열에서 100점에 가까운 점수는 받아야죠. 너무 바쁘다 보면 70점이나 80점이 타협하려고 하는데요. 앞으로도 그 타협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웃음)
K컬처의 화려함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땀방울이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알알이 박힌 크레딧 속 이름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스포트라이트 밖의 이야기들. '크레딧&'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크레딧 너머의 세상을 연결(&)해 봅니다.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