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좋아, 난 꼭 유명해질 거야"…26살에 요절한 천재 소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1 day ago 5

우산(1883).

우산(1883).

“너는 말이다. 한 번쯤 그 긴 혀를 뽑힐 날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그 실천은 엉망이다. 오늘도 너는 열여섯 시간분의 계획을 세워놓고 겨우 열 시간분을 채우는 데 그쳤다. 쓰잘 것 없는 호승심에 여섯 시간을 낭비하였다. 이제 너를 위해 주문을 건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이 도와 반드시 떨어져라. 그리하여 주정뱅이 떠돌이로 낯선 길바닥에서 죽든 일찌감치 독약을 마시든 하라.”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의 주인공은 시험 합격을 위해 이렇게 스스로 다짐합니다. 꽤 독하죠. 이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수험생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독한 쓴소리를 하며 의지를 다지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19세기 러시아 출신의 다재다능한 학생 마리 바쉬키르체프도 그랬습니다.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태어났어. … 나는 반드시 유명해질 거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 1875년 12월 4일, 열일곱살의 그녀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지만 마리는 다른 대부분의 젊은이와 달랐습니다. 실제로 불과 스물여섯 살에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그녀는 명성을 얻게 됩니다. 마리가 남긴 진솔한 일기가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게 계기였습니다. 영국의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톤, 세계적인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프랑스의 소설가 옥타브 미르보…. 수많은 명사와 예술인들이 마리의 일기에 울고 웃었고, 그녀가 남긴 작품을 되돌아보며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팔레트를 든 자화상(1880). /니스미술관

팔레트를 든 자화상(1880). /니스미술관

간절히 명성을 꿈꿨지만 죽고 나서야 유명해진 예술가. 넘치는 재능을 채 다 피우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생을 마감한 청년. 봄날처럼 짧았던, 마리의 삶과 예술 이야기.

피를 토하다

마리의 일기는 열다섯 살이던 1873년부터 시작됩니다. 11년 뒤인 1884년, 그녀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젊디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음에도 우리가 마리의 삶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 그 11년 동안 마리가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꼼꼼히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소녀의 열정과 분노, 사랑과 허영, 호기심과 변덕까지도요.

마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기를 썼던 건, 자신의 일기가 훗날 책으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무살 무렵 마리는 자신의 일기 맨 앞부분에 이런 서문을 덧붙였습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습니다 … 만약 내가 오래 살 수 있다면 나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거예요. 하지만 내가 젊어서 죽는다면, 이 일기는 책으로 나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될 겁니다. 이 책은 아주 솔직하거든요…”

자신의 일기가 출판될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이 작품을 재미있게 읽을 것이며, 자신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 소위 ‘중2병’이라고들 하는 치기 어린 생각 같지만, 마리에게는 그런 자신감을 가질 만한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1858년 우크라이나(당시 러시아 제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마리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별거한 뒤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 니스에 정착합니다. 귀족 가문의 딸답게, 마리는 가정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똑똑하고 의욕이 넘쳤습니다. 러시아어·불어·영어·독어·이탈리아어·라틴어 등을 일찌감치 익혔고, 문학과 역사도 공부했지요. 여러 재능 중에서도 특히 뛰어났던 건 성악. 그녀의 음색은 아름다웠고, 성량은 탁월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명성을 꿈꾼다. 수천 명 관중이 내가 노래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무대에서, 내 목소리로 감동을 주는 것. 그게 내가 꿈꾸는 삶이고, 내 행복이다.”

20세의 마리 바쉬키르체프(1878).

20세의 마리 바쉬키르체프(1878).

하지만 열일곱 살이던 1875년, 가슴과 목의 통증이 시작됐습니다. 2년 뒤 마리는 결국 성악가의 꿈을 포기하고 맙니다. 의사가 진단한 병명은 후두염. 그녀는 적었습니다. “한때 내게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었는데, 이제는 말을 하기조차 쉽지 않다….”

하지만 좌절도 잠시,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그림 재능을 살려 명성을 얻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리는 몰랐습니다.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후두염이 아니라, 결핵이라는 사실을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제 고작 7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요.

일찍 꽃피운 재능

“우리, 파리로 이사 가요. 그림을 배우려면 그곳에 가야 한다고요. 여기 있으면 살아도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열아홉 살의 마리는 어머니에게 빌고 또 빌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말렸습니다. “네 병을 고치려면 따뜻한 이곳에 머물러야 해. 습하고 추운 파리로 가면 상태가 더 나빠질 게 뻔해.” 하지만 마리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울고, 물건을 내던지고, 몸싸움을 벌이고…. 마리를 사랑했고 그녀의 재능을 믿었던 어머니는, 결국 딸의 말대로 파리행을 택합니다.

아틀리에에서(1881). 가로 186cm, 세로 154cm의 대작이다. 아카데미 줄리앙의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이 소년 누드 모델을 그리고 있다. /드니프로 미술관

아틀리에에서(1881). 가로 186cm, 세로 154cm의 대작이다. 아카데미 줄리앙의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이 소년 누드 모델을 그리고 있다. /드니프로 미술관

파리에 도착한 마리는 자신이 입학할 미술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여성들은 가장 권위 있는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는 여성에게도 문을 연 사설 미술 학교, 아카데미 줄리앙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온 재능있는 여성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줄리앙은 마리에게 신세계였습니다. 남녀가 엄격하게 차별되는 바깥과 달리, 그 안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했습니다. 인체 드로잉 연습할 때는 여성 대신 남성 누드 모델이 단상에 올랐으니까요. 학교에서 만난 똑똑하고 실력 있는 학생들은, 자신만 혼자 잘난 줄 알았던 마리에게 자극제 역할도 해 줬습니다.

마리가 생전 라이벌로 여겼던 브레스라우의 '분홍색 모자'(1890). 독일 출신인 그녀는 살롱에서 여러 상을 휩쓴 당대 최고의 여성 화가 중 하나였다. 훗날 그녀는 여성 화가로서는 세 번째, 외국 여성 화가로서는 첫 번째로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게 된다. 그녀는 70세까지 살았다. 그녀의 작품은 생전에 큰 인기를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거의 잊혔다. /개인소장

마리가 생전 라이벌로 여겼던 브레스라우의 '분홍색 모자'(1890). 독일 출신인 그녀는 살롱에서 여러 상을 휩쓴 당대 최고의 여성 화가 중 하나였다. 훗날 그녀는 여성 화가로서는 세 번째, 외국 여성 화가로서는 첫 번째로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게 된다. 그녀는 70세까지 살았다. 그녀의 작품은 생전에 큰 인기를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거의 잊혔다. /개인소장

특히 마리는 한발 앞서가는 실력을 갖추고 있던 루이즈 브레스라우(1856~1927)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습니다. 브레스라우가 당시 최고 권위 전시회였던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자 마리의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그림 공부를 시작했더라면…! 내가 제일 경계하는 사람은 브레스라우다. 저 밉살스러운 녀석은 완벽한 그림을 그린다. 그녀가 나보다 1년 먼저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하다.”(1877년 10월)

이런 자극 덕분에 마리의 실력은 급격히 발전합니다. 불과 스물두 살이던 1880년, 마리는 자신의 도발적인 작품을 살롱 전시회에 걸며 파리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살롱 전시에 그림을 출품하는 건 그야말로 쾌거였지요. 여성이 차별받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대단한 업적입니다.

<이혼>을 읽는 젊은 여성(1880). 마리의 살롱 데뷔작이다.

<이혼>을 읽는 젊은 여성(1880). 마리의 살롱 데뷔작이다.

작품 주제도 주목할 만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이혼>을 읽는 젊은 여성’.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혼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극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는 희곡 <이혼>을 통해 “불행한 결혼생활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해서라도 이혼은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마리는 이 희곡을 읽는 여성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소신과 실력을 동시에 세상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과 대조적으로 마리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짬짬이 기관지 치료를 받았지만 기침과 통증은 계속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그 해, 결핵 합병증 때문에 마리는 한쪽 귀의 청력을 거의 잃게 됩니다. 그제야 의사들은 그녀가 결핵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당장 따뜻하고 건조한 지방으로 가서 요양을 해야 합니다. 이대로 계속 무리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카운트다운

하지만 마리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나는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겨야 해요. 그럴 순 없어요. 절대 파리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단순한 고집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 이 시기, 마리는 불가사의한 직감으로 자신의 죽음을 정확히 예감했습니다. 그해 10월 5일 일기에 마리는 적었습니다. “나는 예언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는 머지 않아 죽을 것이다. 아마도 4년 안에.”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죽음으로 달려가는 카운트다운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여성 초상(1882).

여성 초상(1882).

디나 바바닌의 초상(1883). 그녀는 마리의 사촌이자 평생의 친구였다.

디나 바바닌의 초상(1883). 그녀는 마리의 사촌이자 평생의 친구였다.

마리는 맹렬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요양조차 거부하며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스물세 살이 되던 1881년 그녀는 살롱에 작품 ‘아틀리에에서’를 선보입니다. 당대의 거장들조차 살롱에 작품을 내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신인인 마리가 2년 연속 작품을 냈다는 건 놀라운 성과입니다. “마침내 나는 피를 토하고 말았다.”(1881년 9월 13일) 이때부터 일기에는 각혈과 고열로 쓰러졌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은 3년.

그녀가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의사는 마침내 선언합니다. “병이 계속 악화되고 있습니다. 손을 써도 소용이 없는 상황입니다.” 마리는 코웃음을 치며 짐짓 강한 척을 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마리는 슬픔과 공포로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그 해 마리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사랑 한 번 못 해보고 관 속에 눕는다고? 너무 잔인하잖아….” 남은 시간은 2년.

마리는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병세가 가장 심하던 마지막 4년간, 마리는 수시로 쓰러지면서도 150점에 달하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스물다섯 살이 된 마리는 살롱에서 ‘우산’으로 명예상을 받습니다. 마리는 일기에 썼습니다. “기쁘다. 딱 10년 만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1년에 불과했습니다.

만남(1884). 허름한 옷과 신발, 배경을 통해 소년들이 가난한 노동자 계층 출신임을 보여준다. /오르셰미술관

만남(1884). 허름한 옷과 신발, 배경을 통해 소년들이 가난한 노동자 계층 출신임을 보여준다. /오르셰미술관

스물여섯 살이던 1884년 마리가 살롱에 출품한 ‘만남’은 그녀의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마리는 파리 뒷골목에서 여섯 명의 소년이 길모퉁이에 모여 뭔가를 둘러보는 장면을 실물과 같은 크기로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마리는 도시 빈민층 아이들의 생생한 표정과 몸짓을 세밀하게 포착했습니다. 살롱 전시에 모인 미술계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마리는 이 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다.” 하지만 마리는 그 찬사를 듣지 못했습니다. 결핵의 합병증인 심부전과 늑막염 때문에 전시 현장에 머무르는 것조차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리는 계속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해 6월 30일 마리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작품을 그리고 있지만 완성되지 않는다. 칼로 캔버스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아직 완성도 안 됐는데, 완성하면 수정할 부분들이 수도 없이 보인다!!! 오, 비참하고 저주스럽다! 3개월을 낭비했다! 3개월이나! 안 돼!!!”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4개월뿐이었습니다.

가을(1883). /러시안미술관

가을(1883). /러시안미술관

움켜쥔 모래가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듯이, 마리는 자신의 생명이 몸에서 새어나가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해 4월 마리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과나무 꽃이 만개했다. 노란 꽃이 작은 태양처럼 터진다.” 그 필체는 어딘가 쓸쓸합니다. 마치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봄이라는 것을 직감한 듯이.

그리고, 봄

끝은 생각보다 더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마리의 일기는 1884년 10월 20일, 집에 놀러온 친구를 침대에서 맞이했다는 내용으로 끝납니다. 다음날부터 펜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고, 불과 2주도 지나지 않은 10월 31일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섯. 재능있는 화가의 너무도 이른 죽음에 파리 예술계는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887년, 어머니가 펴낸 마리의 일기는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젊은 여성의 섬세하면서도 적나라한 자기 고백에 예술계는 “소녀의 감수성과 욕망을 거침없이 그려낸 자서전” “19세기 청년의 심리를 그려낸 걸작”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도 마리의 자기표현과 개성을 높이 평가하며 그녀를 “시대를 앞서 산 여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덕분에 마리는 일기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가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내가 오래 살지 못한다면 이 일기로 유명해질 것”이라는 예언이 맞아떨어진 겁니다.

오늘날 마리는 미술계에서도 중요한 여성 사실주의 화가 중 하나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남긴 그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며 절반 이상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작품들은 프랑스 오르세미술관과 니스미술관 등에서 관객을 맞고 있습니다.

봄(1884).

봄(1884).

아름다운 봄이 오면, 인생의 사계절을 모두 겪지 못한 채 너무 일찍 떠나야만 했던 이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생전 마리가 가장 사랑했던 계절도 바로 봄이었습니다. “봄은 너무 아름다워 말로 다 할 수 없다”(16세) “봄이다! 봄이다! 봄이다! 태양은 더 뜨겁고, 오후는 더 아름답고, 밤은 더 향기롭다”(17세) “봄은 영혼을 관통하며 노래하는 색(色)이다. 앞장서 달리는 젊은 신(神)이다”(25세)….올해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마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찬란한 이 계절을, 온전히 행복하게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번 기사는 I Am the Most Interesting Book of All: The Diary of Marie Bashkirtseff(일기 원문),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리베카 모릴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평가,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으로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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