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땐 '9할' 밀라노땐 '건너가는 자'…마음 잡으려 읽고 또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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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역사상 최다(총 7개) 메달 신기록. 쇼트트랙의 ‘GOAT’(greatest of all time) 최민정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가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올림픽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짧은 소식을 접하고서다. 기사에는 그가 반야심경을 바탕으로 쓴 철학서 <건너가는 자>를 여러 번 읽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승부의 세계 한가운데 선 선수가 부담과 압박을 내려놓기 위해 선택한 것이 책 한 권이었다는 사실. “마음을 비우는 과정조차도 공들이고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에 감명받았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최민정은 이번 올림픽 폐막과 동시에 은퇴를 선언해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아직 ‘라스트 댄스’가 남아 있다. 지난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여전히 압도적인 기량으로 종합 1위를 차지하며 태극마크를 단 것. 올해 쇼트트랙 월드투어와 내년 세계선수권 대회가 모두 서울에서 열려 최민정의 질주를 다시 볼 수 있다. 서울 삼성동 올댓스포츠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유독 ‘수행(修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최민정 쇼트트랙 선수가 서울 삼성동 올댓스포츠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박충열 포토그래퍼

최민정 쇼트트랙 선수가 서울 삼성동 올댓스포츠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박충열 포토그래퍼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도 있었는데.

“쉬면서 지내고 있어요. 강아지랑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도 만나고요. 부상당한 곳도 많이 나아졌고, 회복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해 다음 시즌에도 태극마크를 달게 됐습니다. 여전히 최정상 기량인데 은퇴가 아쉽지 않습니까.

“아쉬움은 없습니다. 아직 모든 게 확정됐다기보다 조율해나가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요. 상황에 맞춰 생각하려고 합니다.”

▷지난 2월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쓴 <건너가는 자>를 여러 번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들었습니다.

“비행기와 밀라노 현지에서 틈날 때마다 읽었어요. 올림픽 때는 긴장과 압박이 큰데, 어려운 책에 집중하면 오히려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죠. 마지막 올림픽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거든요. 익숙한 것과 새로운 도전 사이에서 고민이 많은 시기였는데, 삶의 방향성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이라 더 몰입해서 읽은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책이 어려워서 천천히 읽었어요.(웃음)”

▷큰 경기를 치르기 전 책을 읽으며 마음을 정리하는 루틴이 있다고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책 읽는 습관을 길러줬어요. 공부는 안 해도 되지만 책은 꼭 읽으라고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선수촌에서도 꾸준히 읽게 됐죠. 시합 전 긴장되거나 생각이 많을 때 책 읽는 게 도움이 됐습니다. 원래 조금 정적인 걸 좋아하는 성향 같아요. 운동 자체가 워낙 활동적이다 보니 운동이 끝난 시간에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커요.”

▷주로 어떤 책을 읽습니까.

“그때그때 달라요. 마음이 힘들 때는 불교 관련 서적을 보고, 가볍게 읽고 싶을 때는 소설을 봐요. 자기계발서는 운동선수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아서 마음을 다잡는 데 힘이 돼요. 요즘은 철학책도 읽는 편입니다.”

▷인상 깊게 읽은 자기계발서가 있습니까.

“<마지막 몰입> <엘리트 마인드> 같은 책이요. 고등학생 때부터 여러 번 읽었죠. 운동선수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을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체력과 기술은 훈련으로 만들지만 멘털과 태도는 책에서 배우는 부분도 적지 않다고 생각해요. 마음에 드는 구절은 사진으로 찍어 종종 다시 봅니다.”

"평창땐 '9할' 밀라노땐 '건너가는 자'…마음 잡으려 읽고 또 읽어"

▷이전 올림픽 때는 어떤 책을 가져갔나요.

“2018년 평창 올림픽 때는 <9할>을 계속 읽었어요. 일본 승려가 쓴 책인데, 부제가 ‘걱정하는 일의 90%는 일어나지 않는다’예요. 그때는 제가 어리기도 했고, 성적에 대한 압박과 불안이 심하던 시기여서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좋아하는 책으로 가져오셨네요.

“제 인생 책 중 하나입니다. 대학 교양수업 필독서로 접했는데, 당시엔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다시 읽고 굉장히 놀랐죠. 1930년대 쓰인 고전 소설인데도 현대사회를 앞서 내다본 시선이 인상적이었고, 읽을수록 철학적이고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보통 어렵다고 느낀 책은 끝까지 읽기 쉽지 않은데, 다시 도전해서 읽는 편인가 봅니다.

“너무 안 읽히면 잠시 다른 책으로 넘어가기도 해요. 그런데 같은 책도 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보일 때가 있더라고요. 잘 안 읽히던 책이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술술 읽히기도 하고요.”

▷힘든 시기에 특히 의지가 된 책이 있나요.

“선수촌 생활을 오래 하면서 늘 인간관계와 성적에 대한 부담이 작지 않았어요. 쇼트트랙은 몸싸움과 변수가 많아 준비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가 많거든요. 그때 읽은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가 기억에 남습니다. 인도 우화와 설화를 담은 책인데, 제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줬습니다.”

▷밀라노 올림픽에서 여자 계주팀을 이끌며 금메달을 따낸 감동적인 순간, 많은 국민이 최 선수의 리더십에 주목했습니다. 대중은 영웅에게 종종 인품까지 기대하곤 하는데 그런 모습을 완벽하게 충족해준 장면이기도 했고요.

“어렵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땐 책에서 답을 찾는 때가 많았어요. 책을 읽다 보면 좀 더 바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훈련 과정 자체도 어떻게 보면 수행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스포츠는 결과를 내야 하는 세계지만 한 경기의 결과에만 얽매이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거든요.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는데, 책이 그런 부분에서 도움을 줬죠.”

▷외부 변수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는 어떻게 관리하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경쟁보다 스케이트 타는 것 자체를 정말 좋아한 것 같아요. 지금도 어떻게 하면 더 빠르고 좋은 느낌으로 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즐거워요. 성적과 경쟁은 또 다른 문제지만 외부 변수 때문에 제가 좋아하는 스케이트를 잊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즐거움과 결과를 조금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해요. 운이 따르지 않는 경기도 있지만 좋은 흐름이 오는 순간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결과보다 수행 목표에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큰 성취를 이룬 운동선수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는 김연아 선수의 말처럼요.(웃음)

“운동선수에게 자기 연민은 정말 위험한 부분이에요. 힘든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거기에 오래 머물면 발전하기 어렵죠. 지나간 일을 붙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자기 연민에 빠지면 자신을 합리화하고 내면의 우울함에 갇히게 되는 것 같거든요. 운동선수는 계속 이겨내고, 성취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직업이라 그 부분을 가장 경계하고 있습니다.”

▷모든 선수에게 올림픽은 꿈의 무대지만 최 선수에게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세 번의 올림픽이 모두 다른 의미로 남아 있어요. ‘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열정은 변함없지만 어떤 상황에서 올림픽을 맞이했느냐에 따라 느낌은 많이 달랐죠. 평창 이후 아쉬운 마음에 베이징에 도전했고, 베이징 뒤에 또 다른 아쉬움이 있어 밀라노까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밀라노 올림픽을 마친 뒤에는 성적과 별개로 후련하다는 마음이 컸어요.”

▷은퇴 이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아직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웃음) 여전히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당장 눈앞의 경기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선수로 뛰는 동안에는 멀리 보기보다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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