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이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쪽, 이미 승패가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그래도 끝까지 링 위에 남아 있는 존재를 우리는 ‘언더독(Underdog)’이라 부른다. 돌팔매 하나를 든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무명 복서 록키 발보아가 세계 챔피언과 맞설 때 우리는 전율한다. 와인 역사에도 그런 날이 있었다. 전통과 자본이 만들어낸 거대한 권위에 오직 잔 안의 맛과 향으로만 맞서 세계의 기준을 통째로 바꾼 위대한 언더독의 하루. 지금으로부터 딱 50년 전인 1976년 5월 2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 이른바 ‘파리의 심판’이다.
그날 시음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들의 라벨은 모두 삼베로 가려져 있었다. 병은 숨겨졌고 이름은 지워졌다. 와인의 세계에서 샤토의 역사, 산지의 명성, 라벨에 적힌 빈티지의 평판은 잔이 입술에 닿기도 전에 선입견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라벨을 가린다’는 것은 단순히 시음 방식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계급장을 잠시나마 떼고, 오직 와인의 본질로만 겨루자는 선언이었다.
이 자리를 기획한 사람은 파리에서 와인숍과 교육기관을 운영하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였다.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당시 유럽인들에게 변방 취급을 받던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와인들을 가볍게 소개해 보자는 소박한 취지였다. 애초 거창한 혁명 같은 것은 계산에 없었다. 심사위원단 역시 프랑스 최고 소믈리에, 와인메이커, 평론가들로 구성됐기에 모두가 프랑스 와인의 압도적인 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라벨이 가려지자 전문가들의 확신은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파밸리 샤르도네를 마시고는 “프랑스로 돌아온 듯한 훌륭한 맛”이라고 찬사하는가 하면, 부르고뉴의 최고급 와인인 바타르 몽라셰를 두고는 “향이 없으니 캘리포니아 와인이 분명하다”고 단정 짓기도 했다. 당시 시음 현장의 유일한 참관 기자였던 타임지의 조지 M 테이버가 기록한 현장 코멘트에는 심사위원들의 당황스러운 엇갈림이 날것 그대로 담겼다.
먼저 발표된 화이트 부문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내로라하는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들을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은 나파밸리의 ‘샤토 몬텔레나 1973 샤르도네’였다. 게다가 상위 5개 와인 중 3개가 캘리포니아 와인이었다. 프랑스가 자랑하던 화이트 와인의 본진에서 변방의 와이너리들이 단순한 이변을 넘어 압도적인 실력으로 존재를 증명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진짜 드라마는 보르도의 자존심이 걸린 레드 부문이었다.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오브리옹, 샤토 몽로즈 같은 이름들은 와인 세계에서 계급장 그 자체였고, 프랑스 심사위원들은 화이트에서 무너진 자존심을 레드에서 만회하며 기존 질서가 회복되길 간절히 기대했다.
레드 시음에선 프랑스 보르도 그랑 크뤼 4종과 캘리포니아 카베르네 소비뇽 6종이 치열하게 겨뤘다. 그리고 점수표가 모여 평균이 계산된 순간, 현장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보르도의 거함들이 아니라 이제 막 두 번째 빈티지를 출시한 신생 와이너리 스택스 립 와인 셀러의 ‘1973년 S.L.V. 카베르네 소비뇽’이었다. 무통 로칠드와 오브리옹은 그 뒤를 이어 2, 3위에 머물렀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오데트 칸은 결과 발표 후 자신의 점수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만큼 수백 년 역사의 프랑스 샤토들이 받은 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사슴의 도약’이라는 뜻을 가진 스택스 립(Stag’s Leap)은 나파밸리 동쪽 절벽 지형에서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이 봉우리 사이를 뛰어넘어 끝내 탈출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름의 운명처럼 스택스 립은 단단한 힘을 품고 있으면서도 매끄럽고 우아한 밸런스를 갖춰 훗날 평론가들로부터 ‘벨벳 장갑 속의 철권’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된다.
스택스 립의 와인메이커 워런 위니아스키(1928~2024)는 이 역사적인 승리를 단발성 해프닝으로 소비하지 않았다. 전 미국이 환호에 들떠 있을 때도 그는 “우리가 프랑스를 이겼다”는 구호를 내세우는 대신 포도밭으로 돌아가 다음 빈티지를 준비했다. 그의 멈추지 않는 철학은 스택스 립의 핵심 포도밭인 S.L.V.와 FAY의 개성을 집약한 최상위 라인 ‘캐스크23(CASK 23)’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대중이 그 전설의 맛을 가장 가깝고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아르테미스(Artemis)’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계승되고 있다.
2026년 올해로 파리의 심판은 딱 50주년, 반세기를 맞이했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이야기가 여전히 와인 애호가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이유는 단순히 약자가 강자를 꺾었다는 결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좋은 와인의 기준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며, 누가 그 권위를 정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계급장을 뗀 날, 변방의 언더독은 스스로 세계의 새로운 기준이 되며 역사를 다시 썼다. 오래된 성과 유명한 라벨이 없어도, 진심을 다한 땅과 태도가 있다면 언제든 정상에 설 수 있다는 위대한 도약. 그 역사는 오늘도 우리의 잔 안에서 매혹적인 향으로 계속되고 있다.
변원규 Wave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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