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보[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64〉

3 days ago 8

(전략)나는 156쪽짜리 책을 쓴다비와 숲처럼 나는 전망 좋은 벽에 관해 쓴다계획들이 톱질되고 쏟아진다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광고 속에만 있다행복은 이미지로만 전송된다복사꽃이 눈 속에 점점이 붉으면 나는 딴 세상 사람처럼이 세상을 본다에어컨 기사 드릴에 콘크리트 벽 속 철근이 잘린다나를 다시 짜맞추고 셔츠의 단추를 끼우고 바지의혁대를 추스른다잘린 철근 토막을 오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하면 안 되나나는 전화한다누구라도 아무 소식 없이 잘 살고 있다세상은 종이 속 지도가 아니다칠보는 보통 금·은·유리·차거·마노·진주·매괴를 말한다당신은 몇 가지나 가졌는가―박판식(1973∼ )몇 해 전부터 품어온 의문이 이 시에 들어있어 놀랐다. 우리는 더 이상 사는 삶이 아닌 ‘보는 삶’을 산다. “행복은 이미지로만 전송”되고 그것이 정작 내 삶과는 무관해 보일 때 괴리감에 불편했다. 시인의 말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광고 속에만” 있다. 요즘은 깨끗하고 아름답고 오묘한 세계가 내가 읽는 시들 속에도 종종 등장한다. 시가 표방한 아름다움과 이 세계의 천박함이 “딴 세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칠보’는 전통공예 방식이자 일곱 가지 보석 재료를 뜻한다. 만질 수 있는 것. 실재하는 것. 콘크리트 벽을 드릴로 뚫으면 철근이 만져지는 것. 컵을 떨어뜨리면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욕실을 방치하면 곰팡이가 피어나는 것. 돌보지 않으면 사랑은 시들고 돈에 쪼들리면 삶이 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고통조차 매끈하게 보여주는 세상에서 오랜만에 피가 도는 시를 만났다. “잘린 철근 토막”, 우리가 사는 곳의 뼈대를 기억하자. 박연준 시인©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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