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도 나이다냐, 난 그때 날아다녔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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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살 노모와 일흔살 아들의 반세기만의 동거기

‘일흔도 나이냐’는 노모 일갈에
나이 핑계대던 아들 화들짝
늘 움직이고 주변과 관계 좋아야 장수
100세인 외로움 해소 열쇠는 가족

박상철 교수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왼쪽 컴퓨터 화면에는 어머니 모습을 띄워놓았다. 박교수 휴대전화에 저장된 손주와의 영상통화 동영상에서 따왔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박상철 교수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왼쪽 컴퓨터 화면에는 어머니 모습을 띄워놓았다. 박교수 휴대전화에 저장된 손주와의 영상통화 동영상에서 따왔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박상철(76) 전남대 연구석좌교수는 국내 노화장수 연구의 선구자다. 서울대 의대 생화학교실에서 세포 노화연구에 매진하다 1996년 서울대에 체력과학노화연구소를 만들었고 2000년부터는 100세인(人) 연구분야를 개척해 25년간 1500명이 넘는 100세인을 만났다.

그가 최근 ‘백세 엄마, 여든 아들(시공사)’이란 책을 냈다. 2017년 부친 박선홍 옹을 91세로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 강영례 씨(96)와 함께 지낸 7년여 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당초 모자가 살고 있는 전남 광주의 자택으로 찾아가고자 했으나 어머니가 언론사 인터뷰를 극구 싫어하신다고 했다. 17일 서울대 후문에 자리한 국제백신연구소(IVI) 한국후원회장실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아버지가 입고 떠난 70년 된 두루마기

의대에 진학한 뒤 고향에는 명절 때나 손님처럼 찾아가는 무심한 아들이었다. 50년만에 고향살이를 시작한 계기는 2017년 아버지의 타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례식에서 본 아버지 복장이 좀 이상했어요. 수의 위에 빛바랜 하얀 두루마기가 입혀져 있었지요. 내색을 못하고 있다가 며칠 뒤 넌지시 여쭤보니 ‘그 두루마기, 네 애비가 장가올 때 입고 온 옷이다’라고 하세요. 아버지가 70년 전 결혼식 때 처갓집에 입고 간 두루마기를 어머니는 고이 간직했다가 마지막 가는 길에 입혀드린 거죠.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메이더군요.”

70년을 해로한 아버지의 부재가 미칠 영향이 걱정되던 차에 어머니가 폐렴으로 앓아누웠다. 입원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안 보이고 어머니는 “네 애비가 날 부르는구나”고 하는 상황. 다행히 새로나온 항생제 덕에 살아나셨다.

혼례를 마치고 재행길에  나선 처가에서 찍은 사진. 중앙의 젊은 부부가 박교수의 부모님이다. 사진속 아버지가 입고 계신 하얀 두루마기를 어머니는 70년간 고이 간직했다가 부군이 세상 떠나는 길에 입혀드렸다.  박상철 교수 제공

혼례를 마치고 재행길에 나선 처가에서 찍은 사진. 중앙의 젊은 부부가 박교수의 부모님이다. 사진속 아버지가 입고 계신 하얀 두루마기를 어머니는 70년간 고이 간직했다가 부군이 세상 떠나는 길에 입혀드렸다. 박상철 교수 제공

박교수 부모님의 혼례식 장면. 놀랍게도 두 사람은 선을 본 지 일주일만에 혼례를 치렀다고. 박상철 교수 제공

박교수 부모님의 혼례식 장면. 놀랍게도 두 사람은 선을 본 지 일주일만에 혼례를 치렀다고. 박상철 교수 제공
박 교수는 고민에 빠졌다.“어머니와 더 오래, 더 가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으로 가서 어머니 곁에서 살자….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무척 후회할 것 같았어요. 100세인들을 만나고 다니며 그분들이 가진 장남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감을 익히 알고 있었거든요.”

당시 그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석좌교수였다. 5년 계약중 2년이 지난 상태였고 그가 데려온 교수 3명이 자리를 잡는 중이었다. 한편 그의 사연을 들은 전남대에서는 연구석좌교수라는 새로운 직함을 만들면서까지 자리를 마련해줬다. 결국 DGIST의 양해를 얻어 월 1회 대구에 가서 연구를 돕기로 하고 전남대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아흔살 노모와 함께 TV연속극 삼매경


2018년부터 월화수는 광주에서, 목금토일은 서울에서, 한달에 한번은 대구에 가서 1박2일 지내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일흔살 아들과 아흔 엄마의 삶은 크게 변했다.

“새벽 5시면 어머니가 깨우며 ‘목욕하고 오너라’고 하세요. 평소 안 먹던 아침식사를 차려주시니 먹어야 했고 저녁이면 가까운 학교 운동장을 댓바퀴 돌고 오라고 명하셨죠. 술 한잔 마시고 돌아온 날이면 으레 ‘아직도 술 먹고 다니냐’, ‘넌 하는 짓거리가 왜 네 애비하고 똑같냐’며 가차없이 야단을 치시고요.”

박교수는 노모와 한솥밥을 먹고, TV 연속극을 보고, 텃밭을 가꾸고, 꽃구경하며 가끔은 어린 시절처럼 잔소리와 꾸지람도 들으며 일상을 보냈다. 남편이 떠난 후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큰아들을 보살피며 다시 엄마 역할을 부여받아 활력을 되찾았다.

“귀향하면서 스스로 두가지 다짐을 했어요. 첫째, 어머니 말씀은 무조건 들어드리자. 둘째,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자주 갖자. 50년 동안 제가 어머니하고 대화도 해본 적이 없더군요. 명절 때 내려가도 장남이다보니 아버지나 손님들과 대화를 이어가야 했고, 어머니는 주방쪽에만 계셨으니까요. 어머니와 함께 있기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TV를 보는 거였어요. 덕분에 평소 안 보던 드라마도 꽤 봤습니다.”

어머니에겐 일흔 넘은 아들이 여전히 방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던 고교시절의 자식일 뿐이었다. 기거하는 방에 TV를 두려 하자 “공부해야 하는데 무슨 TV다냐”고 못 두게 했다. 나이든 아들은 다시 어려지고 늙으신 어머니는 다시 젊어지는 시간들이다.

“가만히 있으면 뭐 한다냐”


어머니 집에는 45년째 출퇴근하며 살림을 돌봐주는 남순댁이 있다. 두 여동생도 가까이 살며 수시로 드나든다. 어머니가 아들의 건강을 직접 챙기자 86kg에 육박하던 박교수의 체중은 74kg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어머니께 ‘나 살 많이 빠졌죠?’하고 자랑했다가 일언지하에 ‘아직 멀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곁에 있던 여동생이 ‘큰오빠가 일흔 넘어 광주 대구 서울을 다니면서 고생하는데 칭찬도 좀 해주시라’고 거들자 어머니는 ‘일흔 살도 나이다냐? 나는 그때 날아다녔다’고 일갈하시더군요. 일흔이라는 나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니까 더욱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었죠. 눈앞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동안 고민해왔던 연령 한계를 어머니는 손쉽게 뛰어넘으신 거죠. 나이를 핑계로 변화에 소극적이던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가까이서 본 어머니의 삶에는 ‘쉼’이 없었다. 항상 무언가를 하려고 궁리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근교의 100평 남짓한 밭에 80여 가지 농작물을 유기농법으로 재배해 철 따라 각종 야채가 줄이어 나오게 했다. 농사에 미숙한 딸과 사위들을 채근하며 농작물을 때맞춰 심게 하고 풀 뽑고 벌레들을 일일이 잡도록 지시했다.

연령한계는 스스로 뛰어넘는 것


TV에 방영된 각종 건강요리는 메모해뒀다가 일일이 직접 만들어 보기 때문에 어머니 식단은 항상 새로움이 가득하다. 여동생들은 어머니가 식재료를 구해달라 요청하면 툴툴거리면서도 기꺼이 구해왔다. 소싯적엔 국내 맛집기행의 선구자인 백파 홍성유(1928~2002) 선생이 어머니가 해준 추어탕에 감동해 글을 썼을 정도로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좋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지론은 간단해요. ‘가만 있으면 뭐 한다냐?’는 거죠.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자세가 바로 장수인(人)들의 공통점이예요. 도시생활에 젖어 살아온 제게 어머니가 동네사람들과 어울리며 오손도손 지내는 모습도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인터뷰를 왜 싫어하시나요?

“당신이 늙은 모습 보이기 싫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귀찮다는 거죠. 요즘은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세요. 언젠가는 제가 TV 출연해서 어머니가 아흔살 생신 기념으로 딸들과 홋카이도에 여행가셨다고 언급했다가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는 통에 민망했다고 야단치시더군요.”

―96세면 혹시 기억력이 좀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나요?

“우리 여동생들이 어머니 앞에서 말을 못해요. 오만거 다 기억하셔서 끽소리도 못하죠. 한번 본 꽃이나 나무가 어디에 있었다는 걸 일일이 기억하세요.”

광주 어머니 댁에서 가족이 모여 단란한 한때.   박상철 교수 제공

광주 어머니 댁에서 가족이 모여 단란한 한때. 박상철 교수 제공

91~3세 사이 임틀란트 15개, 93세에 대동맥판막대체술


초고령 사회가 당면한 고민 중 하나가 의료시술의 연령한계 문제. 어머니는 최고령 수술 기록의 보유자다. 91~93세 사이 임플란트를 15개나 해 넣었고 93세에 대동맥 판막 대체시술을 받아 전남대 병원 최고령 기록을 썼다.

“30년간 틀니를 사용하셨는데 더 이상은 곤란한 상황이 됐어요. 치과와 상의를 많이 했는데, 잇몸이 괜찮을 것같다고 해서…. 안하겠다는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얼마간이라도 행복한 시간을 사시는 게 낫다고.”

그러던 어느 날 광주에 내려가니 어머니 표정이 아주 밝았다.

“그날 깍뚜기를 씹으셨다고. 시술 후 1년이 지나면서 그동안 마음대로 씹지 못하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특히 좋아하는 고기를 항상 죽이나 미음 형태로 갈아서 드셨는데 육회도 그냥 씹어 드실 수 있게 됐죠. 심지어 누룽지, 쥐포까지 씹을 수 있게 되니 생활에 활력이 생겼습니다. 식욕도 늘어 음식 종류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먹고 싶다 하시니 자식 된 입장에서는 반갑기 짝이 없었죠.”

―그 연세에 임플란트 15개는 대단하시네요.

“어머니가 견뎌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다만 한 3년 되니까 뼈들이 녹아서 다시 빠지고 있어서 요즘 또 좀 불편하세요.”

―그럼 공연히 고생하신 거 아닌가요?

“그때 목표는 어머니가 하루라도 편하게 식사하시는 거였어요. 저로서는 어머니가 다만 몇 년이라도 삶의 질을 즐기셨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영원한 건 있을 수 없죠.”

그 뒤 병원에서 그냥 두면 1년 이상 생존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고 어머니를 설득해 대동맥판막 대체술도 받았다. 박 교수는 90세가 넘으면 큰 외과적 수술은 금기시 돼왔지만 의술이 더 발달하면 병을 치료하며 장수하는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난 95세 이상 아니면 상대 안해요”


“제 주변엔 장수인들만 모여요. 영어로 100세 이상을 ‘센티네리언’, 95세 이상은 ‘세미(semi) 센티네리언’이라고 해서 100세인 취급해요. 그러니 저를 만나려면 만 95세는 넘어야 해요. 하하.”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주변은 별천지처럼 건강한 100세인들이 많다. 인터뷰 중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1928년생)이 방문을 두드렸다. 퇴근 인사하러 오신 것. 국제백신연구소는 한국에 본부가 있는 유일한 UN기구다. 97세인 조 총장은 매일 이곳으로 출근한다. 105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조 총장과 밥먹으러 가끔 들른다고.

“조 선생님도 오래 만났지만 만 95세 되기 전에는 인터뷰를 안 했어요. 이길여 가천대 총장(1932년생)도 저랑 친하지만 100세인 대접 받으려면 2년 이상 기다려야 해. 이 총장이 ‘나도 나이 많다’고 하면 제가 ‘그게 무슨 나이냐’며 잘라버리죠.”

―2000년 경부터 100세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1994년 국내최초로 노화 종적(縱的) 관찰을 시작했는데 연구비가 문제였어요. 종적 연구는 하버드대처럼 적어도 80년은 해야 성과가 나오는데, 한국 현실은 길어봐야 3년짜리예요. 그래서 방향을 바꿔 추적의 제일 끝, 즉 종말기를 봤어요. 그걸 100세로 설정하고 세가지를 연구합니다. 첫째 종말기에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의학적 조건이 뭐냐. 둘째 그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는가. 셋째 수명연장은 어떻게 가능할까.”

시행착오를 거쳐 서울대 다양한 분야 교수들을 불러모아 세계 유일의 다학제적 100세인 연구팀을 만들었다. 이 팀이 2006년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로 이어졌다. 그는 국제백세인연구단(ICC) 세계대회에 참석한 해에 회장으로 뽑혀 2006년 한국에서 세계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어머니 모시고 외출에 나선 큰아들 박상철 교수.  박상철 교수 제공

어머니 모시고 외출에 나선 큰아들 박상철 교수. 박상철 교수 제공

초고령사회, 고향과 가족의 의미


―학술적인 책만 내시다가 개인사를 쓴 이유는…

“100세인 연구를 하다 보니 20년 전과 너무 달라졌어요. 전에는 혼자 사는 분이 10% 정도였는데 지금은 30~50%가 혼자 살아요. 요양원 사는 분도 20~30%예요. 가장 큰 문제는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의 본질은 가족이죠. 이 가족 관계가 갈수록 멀어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모신다는 게 노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보람있는 일인지 좀 알리고 싶었습니다. 가령 제가 24시간 모시는 것은 못 하지만 자주 어머니 옆에 있기만 해도 어머니에게 활력과 즐거움이 생깁니다. 밭에 가서 작물 중에도 좋은 것 있으면 동생들에게 ‘그거 큰오빠 줄란다’하며 즐거워하세요. 남녀평등 관점에서는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어르신한테는 그게 힘이니까. 여동생들은 뭐 ‘좋을 대로 하세요’하면서 즐겁게 져드리죠.”

그는 책을 쓴 또다른 이유를 덧붙였다.

“어머니께 헌정하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뭐라도 하나 남겨드리려고 메모를 해 온 걸 책으로 낸 거죠. 이번에 내려가서 드릴 건데, 아마 ‘뭐 이런 쓸데없는 걸 썼냐’고 야단치실 거예요.”

박상철 교수는 지금까지 40권쯤 책을 썼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박상철 교수는 지금까지 40권쯤 책을 썼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늙은 세포가 더 안 죽는다


―‘거룩하게 늙는다’는 표현을 자주 하시는데.

“21세기 들어 노화세포의 특성이 새로 발견됐어요. 늙은 세포가 젊은 세포보다 치명적 스트레스에 더 강한 저항성을 보여요. 잘 안 죽는다는 거죠. 개체 수준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노화란 생명체가 단순하게 죽음에 이르는 단계가 아니고 오히려 죽음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과정이라고 봐요. 증식을 포기하는 대신 생존을 보장받는 생명유지 현상인 거예요. 이렇게 보니 늙음의 의미가 특별해지죠.

실제로 100세 넘어서도 당당하게 활동하는 분들을 만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들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와 생명을 마지막 순간까지 소중하게 지키려는 의지가 느껴지거든요. 그 점에서 나이듦과 늙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해요.”

―노인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성스럽고 거룩한 결정체다.

“제가 결정적으로 사람에게 이 개념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광주 대교구 윤공희 대주교(1924년생)예요. 2023년에 백수연 축하미사에 갔다가 감동했습니다. 만 99세 어르신이 1시간 동안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에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는 하느님이 사랑에 맡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라는 강론을 하세요.

그분이 살아온 길까지 생각하면 99세 신부가 말씀하는 구절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것 같더군요. 그 강론을 들으면서 아, 이거구나. 사람한테도 ‘늙는다는 것은 거룩한 일’이란 메시지를 던지자.”

대학생 시절 외갓집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화면에 띄워봤다. 외조부모님이 중앙에 계시고 맨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20대의 박 교수라고.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대학생 시절 외갓집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화면에 띄워봤다. 외조부모님이 중앙에 계시고 맨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20대의 박 교수라고.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행복한 100세인=자식 이웃과 관계가 좋은 사람

그는 지난해 12월 고령화와 노인 복지를 연구해온 국내 석학 70여명과 함께 ‘시니어 스카우트’ 결성을 제안했다. 시니어스카우트는 복지 혜택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노인이 아니라 사회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시니어들의 연대를 뜻한다. 오는 4월 정식 출범할 예정이다.

―100세인들의 특징이라면.

“수많은 100세인을 만나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일들을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의 삶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게 항상 무엇인가 하시는 모습, 새로운 것을 배워 시도해보는 도전정신, 자식 및 이웃과 어울리고 배려하는 삶,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 건강을 스스로 지키려는 적극적 노력, 일흔이 넘은 자식에게 꾸지람을 주며 생활을 지도하는 어머니의 당당함. 이런 것들이죠.”

여든을 바라보지만 백 살을 바라보는 어머니 앞에서는 늘 어린 아들이다. 그래서일까. 박 교수는 내내 유쾌하다. 책이건 말이건 매사에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고 주어진 여건과 주변 존재들에 대해 고마워한다. 간혹 자랑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어쩌랴. 정말 자랑스러운 것을.

만년의 부모님. 금강산 구룡연에 가셨을 때다. 서로 배려하는 사이 좋은 부부였다.  박상철 교수 제공

만년의 부모님. 금강산 구룡연에 가셨을 때다. 서로 배려하는 사이 좋은 부부였다. 박상철 교수 제공

‘백세엄마 여든 아들’을 읽는 어머니. 박교수는 어머니가 책을 받은 날 밤부터 즉시 독서에 돌입했다고 사진을 찍어 알려왔다. 책 내용에 대한 어머님 반응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고. 박상철 교수 제공

‘백세엄마 여든 아들’을 읽는 어머니. 박교수는 어머니가 책을 받은 날 밤부터 즉시 독서에 돌입했다고 사진을 찍어 알려왔다. 책 내용에 대한 어머님 반응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고. 박상철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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