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올해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세 차례 상영됐다. 지난 29일 공식 프리미어 상영에 앞서 진행된 두 차례의 비공식 ‘P&I(프레스 및 인더스트리)’ 시사는 영화의 미학적·상업적 성패를 가늠할 풍향계로 관심을 모았다. 각국에서 온 기자들과 영화산업 관계자를 대상으로 작품을 평가받는 자리여서다. 여기서 의외의 장면이 연출됐다. 깐깐한 관객들이 이따금씩 폭소를 터뜨리더니 상영 중간에 커다란 박수갈채를 터져 나왔다. 베니스에서 ‘고추잠자리 씬’으로 통하는 시퀀스가 나왔을 때로, 주인공인 만수(이병헌)가 범모(이성민), 아라(염혜란)과 총 한 자루를 두고 활극을 벌이는 장면이다. 해외 영화계에선 아직 이름이 덜 알려진 두 배우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이성민과 염혜란은 각각 머릿속이 온통 종이로 가득 찬 제지업계 기술자인 남편 범모와 그리운 옛 추억과 못마땅한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아내 아라의 애증적인 사랑을 연기로 선보였다. 두 사람은 주인공 부부인 만수(이병헌)와 미리(손예진) 부부의 철저한 ‘안티테제(antithesis·정반대)’로, 영화를 전개하고 설득력을 불어넣는 데 윤활유가 되는 비중 있는 캐릭터다. 특히 고추잠자리 씬은 범모와 아라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한 구도를 무너뜨리고 만수라는 인물이 욕망과 갈등을 오가게 만드는 영화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순간이다. 시사회 이튿날인 30일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에서 만난 이성민과 염혜란은 “사실 가장 걱정했던 장면”이라며 “반응이 좋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범모와 아라는 부부면서도 극과 극의 인물이다. 범모가 오직 한 우물만 파는 외곬수에 아날로그형 인간이라면, 아라는 무엇하나 진득하게 해내지는 못하지만 다채로운 색깔이 가득한 삶을 꿈 꾼다. 이런 차이는 두 배우에게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박찬욱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내 캐스팅을 제안했을 때 염혜란은 “기존 연기 이미지와 정반대의 역할이라 ‘도대체 왜 저를 쓰려고 거냐’고 물었다”고 한 반면, 이성민은 “시나리오 보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다”며 “속으로 ‘이걸 소화할 배우는 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영화·드라마·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한국의 실력파 배우로 통하는 이성민과 염혜란의 연기는 ‘어쩔수가없다’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비결은 배역과의 ‘동기화’에 있다. 이성민은 25년을 일했지만 내 집 하나 없고, 몸은 약해 짐 나르는 아르바이트도 못 하면서 기술자라는 자존심만 남은 범모의 ‘어쩔 수 없는’ 핑계에 집중했다. 그는 “나도 스무살부터 연기만 하고 다른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그런 점에서 보면 구범모가 바로 나인 터라 범모에게 끌렸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가 단순히 실직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단 앞으로 우리 모두가 당면할 문제라고 생각했다”며 “‘배우라는 직업이 사라지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상황에서 내가 할 말이 곧 범모가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염혜란은 만수의 아내 미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로 아라를 설정하고 연기에 임했다. 실제로 영화에서 미리는 ‘돌싱’, ‘새출발’ 같은 만수를 떠날 수 있다는 은유가 나오는 것과 달리 가정을 지키려 하지만, 아라는 싫증난 몰래 부정을 저지르고 심지어 총을 들고 남편을 향해 주저없이 쏜다. 그는 “오히려 제일 가까운 부부 사이라 내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할 때가 있다”며 “만수는 아라를 통해 (아내의 마음을) 듣게 된다. 아라를 통해 미리의 서사는 열린 결말이 된다”며 영화를 읽는 팁을 넌지시 내놨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헌신적인 엄마 광례로 사랑받은 그는 “광례를 지우고 아라를 봐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두 배우는 이날 조만간 국내 개봉할 ‘어쩔수가없다’가 한국 영화의 활력소가 되길 기대한다는 마음을 전했다. 이성민은 “‘영화라면 이래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눈과 귀가 즐겁고 이야기가 근사한 작품이 ‘어쩔수가없다’로 극장에서 보면 마치 근사한 미술관을 다녀온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서 “베니스 상영으로 좋은 평가가 있다는데,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한국에서 관객들이 많이 보러 왔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베네치아=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