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에서 관객분들에게 음악을 들려드린다는 점 자체가 너무 즐거워요. 슬럼프도 아직 없었다고 생각해서 극복 방안도 없습니다.”
피아니스트 츠지이 노부유키는 공연기획사 마스트미디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츠지이는 순수함하고 천진난만한 태도로 공연을 즐기는 아티스트다. 그의 연주에선 좌절, 고뇌, 번민의 순간이 드러나지 않는다. 듣는 이들의 마음을 채우는 건 인생 역정을 극복하는 인간 승리 서사보다는 주어진 순간을 최대한 즐기려는 음악가의 낙천성이다.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선보인 공연에서도 츠지이는 소리를 즐긴다는 음악(音樂)의 어원적 본질에 충실했다.
밴 클라이번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우승자의 연주
츠지이는 인생 역정이 다른 음악가들과 다르다. 그는 악보를 못 본다. 선천성 소안구증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눈이 보이지 않아서다. 이 때문에 새 곡을 연주할 땐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연주한 음원을 각각 들어 외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악곡의 시각적인 구성을 파악하는 건 그에겐 상상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의 눈으로 모든 걸 볼 수 있기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공연 그 자체를 즐기며 망설임 없이 건반을 치는 그의 행복한 모습은 음을 매개로 관객들에게 옮아간다.
츠지이는 2022년 임윤찬의 우승으로 국내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미국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의 2009년 공동우승자다. 2009년 대회는 이 콩쿠르가 기리는 피아니스트인 밴 클라이번이 직접 우승자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대회이기도 했다. 밴 클라이번은 2013년 2월 타계했다. 대회는 4년마다 열린다. 밴 클라이번은 츠지이의 연주를 두고 “기적 그 자체를 보여줬다”며 “마음을 치유하는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1년 만의 내한 공연에서도 츠지이는 관객들의 마음을 치유했다. 그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인 ‘발트슈타인’으로 1부를 시작했다. 이 곡은 베토벤이 귓병 악화로 유서를 쓸 정도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음악에서 전성기를 꽃피웠던 1800년대 초에 쓰였다. 츠지이는 단단한 저음 화음을 왼손으로 정갈하게 표현하며 이 곡의 1악장을 소화했다. 원곡의 질감에 충실하려는 인상이 강했다. 3악장에서 휘몰아치는 글리산도(두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연주하는 주법)는 격정적이기보단 담담한 쪽에 가까웠다.
주저함 없는 연주로 만든 쇼팽
다음 곡은 리스트의 ‘꿈 속에서’와 메피스토 왈츠 1번이었다. 메피스토 왈츠 1번의 화려한 연주에 진입하기에 앞서 ‘꿈 속에서’는 분위기를 가다듬는 전채요리 역할을 했다. 왈츠부터는 츠지이의 능숙한 기교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 곡은 리스트의 곡 중에서도 기교와 감수성 모두를 요구하는 난곡으로 알려져 있다. 츠지이는 뒷 박자에 힘을 주는 당김음을 쓰는 것처럼 재즈 피아노와 비슷한 분위기를 내면서 왈츠를 산뜻하게 연주했다.
공연 2부는 쇼팽의 시간이었다. 츠지이는 쇼팽 야상곡 7번과 8번을 선보인 뒤 소나타 3번의 모든 악장을 연주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은 그의 다른 소나타보다 장대한 느낌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꼽힌다. 쇼팽은 츠지이가 ‘피아노의 근원’으로 여기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츠지이는 주저함이 느껴지지 않는 청명한 음색들로 야상곡을 연주한 뒤 소나타에서 선율을 이끄는 데에 집중했다. 연주에 몰입한 츠지이가 격정적으로 고개를 휘젓거나 흔들 때는 이따금 저음부가 안개처럼 흐릿한 인상을 내거나 연주 속도가 빨라지는 느낌이 나기도 했다.
츠지이의 낙천성이 관객에게 전율로 다가온 순간은 앙코르 연주에서다. 츠지이는 이번 공연에서 무려 4곡을 앙코르로 선보였다. 지난해 내한 공연에서보다 1곡이 늘었다. 청중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를 의식한 듯 다른 공연들에서보다 열띤 박수로 츠지이의 열연에 호응했다. 그러자 츠지이는 아이처럼 맑게 웃는 표정으로 허리를 90도 굽혀 동서남북 인사한 뒤 피아노에 다시 앉았다. 첫 앙코르 곡은 ‘비창’으로 알려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의 2악장. 잔잔한 선율로 황홀함을 선사한 그는 비창을 연주한 뒤 다시 일어나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외쳤다.
순수함이 만든 확고함
우렁찬 한국말에 청중들은 환호하자 츠지이는 영어로 공연이 즐거웠는지 물었다. 관객들은 “네”라고 화답했다. 츠지이는 헤맑게 웃으며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를 외치곤 피아노에 다시 앉았다. 앉고 나서 두 번째 앙코르 곡을 치기까진 3초도 걸리지 않아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타건음과 겹칠 정도였다. 주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천진난만한 표정과 함께 그는 쇼팽의 연습곡 12번인 ‘혁명’을 연주했다. 그의 손에서 쏟아져나온 음표들이 공연장의 공기를 또렷하면서도 먹먹하게 채웠다. 분수에서 뿜어나온 물줄기가 대기로 흩어지는 듯했다.
유려한 연주로 박수를 받은 츠지이는 세 번째 앙코르 곡으로 차이콥스키 ‘호두까기인형’의 행진곡을 친 뒤 마지막 앙코르 곡으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연주했다. 부들부들한 솜 위에 쌀알 만한 유리구슬들이 우르르 떨어지는 것처럼 맑고 보드라운 소리가 관객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츠지이의 날렵한 연주가 끝나자 여운을 즐기려는 관객들이 만든 침묵이 뒤따랐다. 이어진 환호성이 침묵을 몰아내자 츠지이는 건반 덮개를 닫고 손을 휘젓는 것으로 공연의 마지막을 알렸다. 웃으며 퇴장하는 그에게 빠진 관객 일부가 눈물을 참으려 훌쩍이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츠지이는 이날 자신의 앨범인 ‘베토벤: 함머클라비어, 멀리 있는 연인에게’도 발매했다. 그가 독일 클래식 음악 음반사인 도이치그라모폰을 통해 처음 내놓는 앨범이다. 그는 지난해 4월 일본인 피아니스트로는 최초로 이 음반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번 앨범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인 ‘함머클라비어’와 리스트가 편곡한 베토벤 연가곡인 ‘멀리 있는 연인에게’ 등을 담았다. 츠지이는 이번 앨범을 소개하면서 “베토벤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겹치는 부분도 있다”며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지만 이 소나타처럼 경이롭고 지극히 까다로운 작품을 남겼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으로 연주에 임했다”고 말했다.
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