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광인' 궤도 "직화구이 고기처럼, 책은 가장 맛있는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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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가 서울 역삼동 ‘북쌔즈’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던 중 책꽂이에서 발견한 <플랫랜드>를 꺼내 들고 있다. 이 책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수학적 소재로 SF 세계를 만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형택 기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가 서울 역삼동 ‘북쌔즈’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던 중 책꽂이에서 발견한 <플랫랜드>를 꺼내 들고 있다. 이 책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수학적 소재로 SF 세계를 만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형택 기자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박사급 아재들이 직접 만든, 본격 과학 채널.’

128만 명의 구독자를 지닌 유튜브 채널 ‘안될과학’(UnrealScience) 소개글이다. 이 채널의 주요 멤버는 천문우주, 전자공학, 약학, 물리학, 고생물학 석·박사다. 생각만 해도 지루한 순수과학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법한 과학기술까지 다룬다. 그중 ‘궤도의 과학속으로’라는 코너를 진행하는 ‘궤도’(본명 김재혁)는 요즘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다. 그의 콘텐츠는 일단 재밌다. ‘소개팅을 성공하는 과학적 방법은?’ ‘산타와 루돌프가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는 과학적 이유는?’ 등 언뜻 과학이랑 상관없어 보이는 질문도 과학적으로 풀어낸다. 모든 것을 과학으로 쏟아내는 그에겐 ‘과학 광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궤도의 과학 허세> 
‘밈’을 활용해 쉽게 쓴
과학 입문자를 위한 책

<궤도의 과학 허세> ‘밈’을 활용해 쉽게 쓴 과학 입문자를 위한 책

<궤도의 과학 허세> <과학이 필요한 시간> 등의 입문용 책도 낸 그는 연세대 천문우주학과에서 석사 학위까지 마친 우주 전문가. 과학 토크로 11시간25분57초의 최장 기록을 갖고 있는 그는 다독가이기도 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스케줄에 목도 쉬고 피곤해 보였지만 “과학책 이야기를 한다길래 시간을 쪼개서 왔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추천 책을 미리 부탁했는데, 전부 과학책이고 거의 신간이네요.

“네, 과학책을 가장 많이 보죠. 과학책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영역을 알려줘요. 완전히 새로운 눈을 만드는 겁니다.”

<과학이 우리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실험을 통해 풀어준 책

<과학이 우리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실험을 통해 풀어준 책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뭔가요.

“<과학이 우리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과 <양자역학의 역사>. 첫 번째 책은 자유의지에 관한 이야기를 다양한 실험을 통해 굉장히 재미있게 풀어요. 저자인 존 딜런 헤인즈를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요. ‘자유의지는 있을까’라는 질문은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닐 수 있어요. 과학적 설계를 통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의 실험을 했어요.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엔 철학적·윤리적 관점이 들어가죠.”

▷평소 책은 어떻게 고르고 읽나요.

“집에서 의자에 앉아 봅니다. 여러 권을 한꺼번에 보는 편이에요. 과학책은 이미 아는 내용이 많다 보니,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봅니다. 저자가 중요하고, 제목이 식상하지 않으면서 딱 맞게 지었다 싶은 책에 끌립니다. <이기적 유전자> <시간의 역사> 이런 제목 기가 막히잖아요.”

▷공상과학소설(SF)도 좀 봅니까.

“SF 좋아하죠. 김초엽 작가 책은 나오면 일단 봅니다. <지구 끝의 온실>을 좋아해요. 장강명, 배명훈, 천선란 작가의 책도 챙겨 봅니다. 우리나라 작가들도 너무 좋은 글이 많은데 SF는 해외 작가들에게 편중된 경향이 있어요. 한국 SF는 장편이라도 현실에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읽다 보면 자본주의, 장애 차별, 계급 차이 등 현실 문제가 생각나죠. 물론 <듄>처럼 스케일 크고 세계관이 촘촘한 작품도 좋아합니다.”

▷어렸을 땐 어떤 책을 좋아했나요.

“글을 못 읽을 때부터 과학 만화를 좋아했어요. 거의 너덜너덜해져서 인쇄가 지워질 때까지 읽었어요. 물리학을 특히 좋아했어요. 어렸을 땐 물리학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물리학이었죠. 또 우주를 좋아했어요. 하늘과 달 보는 것도요. 물리학과 우주를 좋아하다 보니 결국 천체물리학 전공으로까지 이어졌죠.”

▷어렸을 때부터 가진 흥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진 거네요.

“네, 다만 과학자가 될 줄 알았는데 과학 유튜버가 된 거죠. 과학자가 되기엔 머리가 덜 좋았어요. 더 머리 좋고 훌륭한 분들이 과학자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과학자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그들이 더 잘 연구할 수 있는 환경, 토양을 만들자.”

▷과학 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도 많습니다. 아이가 과학책을 읽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녀가 과학에 흥미를 보이는 건 위험한 일인데…. 한국에선 과학의 길을 가는 게 전혀 좋지 않아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방향은 아니니까요. 아이가 과학에 흥미를 느낀다면 끝까지 과학자가 될 수 있게 지원해주면 좋겠지만, 보통 흥미만 갖고 나중에 의사가 되기를 바라겠죠. 과학에 억지로 흥미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어요. 모든 사람이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거든요. 저는 모든 사람이 과학자가 되는 세상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모두가 과학에 호감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거예요. 일부 과학자가 그 호감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원하는 연구를 해서 인류를 진보시키길 원하는 거죠.”

▷영향을 받은 다른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있나요.

“우선 미국의 칼 세이건이 있죠. 영국의 마이클 패러데이, 이분은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라는 말 자체를 처음 만든 분이죠. 살아계시는 분 중 제가 영감을 많이 받은 사람은 영국의 브라이언 콕스예요. 칼 세이건의 뒤를 이어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의 호스트를 맡은 닐 디그래스 타이슨도 있고요.”

<코스모스> 
‘글은 이렇게 써야 하구나’ 
느끼게 해준 인생 책

<코스모스> ‘글은 이렇게 써야 하구나’ 느끼게 해준 인생 책

▷이 길을 걷게 된 데 영감을 준 책을 꼽아 본다면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일단 바이블입니다. ‘인생 책’이랄까요. 고등학생 때 처음 읽었고, 대학원생 때도 봤고 지금도 종종 펴봐요. 처음 읽었을 때 엄청나다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 너무 글도 재밌게 잘 쓴다,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했죠. 오래된 책이라 최근 연구 결과들이 다 담겨 있진 않지만 우주 전반에 관한 내용을 거의 다 담고 있어요. 만약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이죠. 방대한 양이고 어려운 내용이 많지만, 저자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듯 풀어내는 게 핵심이에요. 그게 굉장히 자연스럽고 멋집니다.”

▷‘궤도’ 하면 “OO도 과학입니다”라며 모든 걸 과학으로 풀어내는 게 특징인데요. 시청자의 ‘질색하는’ 반응이 뒤따릅니다. 물론 웃자고 하는 콘셉트이긴 하지만요.

“몇 년 전만 해도 레거시 미디어를 중심으로 과학 얘기가 많이 나오면 듣기 힘들어하는, ‘질색하는’ 콘셉트가 확실히 있었어요. 그동안 ‘과학은 힘들어’가 대중의 관점이었죠.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단순히 ‘과학은 힘들어’가 아니라 ‘더 듣고 싶어’ ‘조금 더 알려줘’ ‘재밌어’ 하는 분이 많아졌어요.”

▷굳이 과학에 관심 없는 사람들한테까지 왜 과학을 알려주려고 하나요. 과학의 대중화는 왜 해야 합니까.

“사실 과학적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과학적 사고를 길러야 해요. 과학적 사고는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거죠. 세상을 살다 보면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많잖아요. ‘왜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벌어질까?’ 이런 의문에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게 우리 모두 과학적 사고를 하는 겁니다. 결국은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인 거죠.”

▷유튜버이고 주로 영상 매체를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활동을 하는데, 그럼에도 책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책은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오래된 수단이잖아요. ‘책을 계속 봐야 한다’가 핵심이 아니라 ‘왜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보는가’를 생각해봐야 해요. 우리는 고기를 직화로 구워 먹는 걸 좋아합니다. 인류가 최초로 고기를 구워 먹은 방식이거든요. 팬에 굽거나 삶는 등 여러 방식이 나왔지만 결국 인류가 가장 오랜 기간 고기를 먹어온 방식은 직화예요. 영상의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맛있는 방식은 글을 읽는 것 아닐까요? 책장을 넘길 때의 촉감, 호흡이 중요하죠. 웹툰 시장이 발달해도 여전히 만화책이 팔립니다. 스크롤을 내리며 보는 웹툰은 호흡이 끊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종이를 넘길 때 호흡이 멈추면 그 긴장감이 있죠.”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것은 많은 부분 재능이겠지만, 또 어떤 노력을 하나요.

“온종일 고민해요. 지식을 습득하지 않는 순간에도. 하다못해 ‘미스터 트롯’을 보면서도 ‘서바이벌 방식으로 진화론, 생존 전략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이코패스가 분노해 사람을 죽이는 스릴러를 볼 때도 ‘어떻게 화를 내게 된 걸까’ 과학적인 설명을 고민하는 거죠. 적어놓고 기억하고 또 적어요.”

▷책 속 한 문장을 꼽는다면.

“이건 정말 어려운데…. 예전에 교양 과학 잡지 ‘스켑틱’에 제가 글을 한 번 쓴 적이 있어요. ‘과학은 관측되는 결과에 따라 끊임없이 변절해야 하는 지조 없는 맹세다’. 제가 만든 문장인데 제가 생각해도 멋진 것 같아요. 과학자는 절대 신념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항상 틀릴 수 있다는 점,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썼죠.”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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