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보면 남는 건 두 가지다. 아름다운 작품이 주는 여운이 한 가지, 감상에 기력을 쏟아 주린 배가 나머지다. 꽃구경도 식후사(食後事)라고 했다. 미학(美學)이 미식(美食)으로 이어지는 즐거움이야말로 전시의 백미라고 하겠다.
갤러리 속 레스토랑은 단순히 음식을 대접하는 공간이 아니다. 맛 좋은 음식은 감상 분위기를 돕고, 실내외에 걸린 작품들이 갤러리의 첫인상을 좌우한다. 서울 종로구 화랑가의 대표 갤러리들이 메뉴 개발부터 와인 페어링, 인테리어까지 까다로운 검수를 거치는 이유다.
“미술-미식 연결” 국제갤러리 ‘더 레스토랑’
국제갤러리는 서울 소격동 K1 건물 1층에 ‘카페@더 레스토랑’과 2층 ‘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식 수프인 ‘애플 포타주’를 비롯한 제철 코스요리를 양혜규 작가의 최신 설치작업과 함께 음미할 수 있다. 일본 도쿄의 고급 호텔과 대형 외식 그룹 총괄 셰프를 지낸 아베 고이치가 개관 이후 줄곧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은 갤러리 레스토랑의 불모지였다. 1999년 국제갤러리가 국내 화랑으로서 처음 레스토랑을 열자 미술계는 반신반의했다. 외환위기 직후 갤러리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절 미식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갤러리 운영을 위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이현숙 회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이런 운영 철학은 2세 경영자인 김찰스창한 사장으로 이어졌다. 현재 갤러리 운영 전반에 관여하는 김 사장의 첫 임무는 레스토랑과 카페 경영이었다. 국제갤러리 관계자는 “(김 사장은) 지금도 신메뉴 개발 과정에서 하나하나 맛을 본다”며 “미술과 미식을 잇겠다는 취지로 레스토랑 운영에 각별히 신경 쓴다”고 말했다.
1층 카페에서 제공하는 메뉴는 107가지에 이른다. 샌드위치와 도시락 등 간단한 요리부터 파스타와 피자, 스테이크 등 양식까지 다양하다. 김치볶음밥과 해장 짬뽕 등 분식집에서 나올 법한 메뉴도 있다. 식사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관람객이 없게끔 최대한 넓은 스펙트럼의 ‘입맛’을 공략한 결과다.
레스토랑 내부에 걸린 작품들은 시즌마다 바뀐다. 현재 레스토랑에는 양혜규 작가의 ‘사실상事實上(댄으로부터)’ 시리즈 두 점이 걸려 있다. 지난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 기간에 국제갤러리 부스에 출품됐던 양 작가의 최신 연작이다. 카페의 벽면과 냅킨 등 사소한 소품까지 김영나, 홍승혜 등 갤러리 전속 작가들의 손길이 묻어 있다.
2대에 걸친 미식 사랑…갤러리현대 ‘두가헌’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뒷골목엔 1910년대 지어진 한옥과 구한말 러시아식 벽돌 건물이 맞닿아 있다. 한 종교 단체가 쓰던 건물을 갤러리현대가 인수했다. 2004년부터 한옥은 퓨전 레스토랑 ‘두가헌’으로, 벽돌 건물은 식당 손님한테 무료로 개방하는 ‘두가헌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두가헌은 우리말로 ‘매우 아름다운 집’이란 뜻이다.
예스러운 한옥 건물과 대조되는 메뉴가 특징이다. 올해 봄엔 아스파라거스와 감태 크림, 마늘 버터 소스를 더한 전복구이를 비롯한 코스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버섯을 넣은 매시 포테이토, 데미글라스 소스의 안심 스테이크 등 부드러운 질감의 식사 위주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오래전부터 갤러리현대를 찾는 전통적인 컬렉터 및 원로 작가의 취향에 맞는 저염 조리와 부드러운 텍스처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설립 초기부터 ‘와인&아트’ 콘셉트를 지향한 두가헌 지하 공간에는 약 300종의 와인 3000여 병이 보관돼 있다. 레스토랑에서 판매하는 이탈리안 프렌치 퓨전 메뉴와 페어링하기 제격이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처음 아버지와 이 한옥을 발견했을 때 지하가 와인 보관고로 완벽하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갤러리 속 작은 갤러리’가 두가헌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식당 입구부터 강익중 작가의 달항아리 그림이 손님을 맞이한다. 내부엔 김창열 작가의 물방울, 김상우의 마릴린 먼로 등 갤러리현대 소속 작가들의 대표적인 화풍을 만나볼 수 있다.
남산까지 한눈에…PKM가든레스토랑
청와대 동편 삼청동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고즈넉한 주택가가 나온다. 일반인의 청와대 출입이 통제되던 시절부터 인적이 한산했던 골목이다. 이곳엔 ‘경치 맛집’으로 입소문 난 PKM가든레스토랑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PKM가든레스토랑은 PKM갤러리 2층에 조성됐다. 2층 주택을 개조한 갤러리답게 널찍한 잔디 마당이 특징이다. 전시장으로 사용되는 PKM갤러리 본관의 옥상 주변이 레스토랑 앞의 마당이 되는 셈이다. 맑은 날엔 삼청로부터 광화문, 남산의 서울 N타워까지 한눈에 보인다.
설립 초기 PKM가든 레스토랑은 몇몇 컬렉터를 위한 ‘아지트’였다. 소수 미술 수집가나 사전 예약자를 위한 카페를 2015년 마련한 게 시작이었다. PKM갤러리 관계자는 “전시를 찾는 관람객이 늘며 2017년 모든 고객을 대상으로 점심 식사, 2018년 저녁 메뉴까지 확장했다”고 설명했다.
윤형근, 구정아 등 갤러리 소속 작가들의 면면이 보이듯 미니멀리즘적인 디자인이 특징이다. 모노톤으로 꾸민 레스토랑 내부엔 박현진, 정희승의 작품이 걸려 있다. 음식도 정갈한 편이다. 흰색 계통 접시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이탈리안 음식을 담는다. 대표 메뉴는 명란과 모시조개, 새우 등 해산물이 들어간 오일 베이스의 파스타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