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축복, 의도치 않은 행운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 세렌디피티. 동명의 영화 덕분에 알게 된 이가 많을 것이다. 25년 전 영화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가 최근 되살아났다. 스리랑카를 다녀온 뒤였다. 스리랑카가 이 단어의 기원이란 사실을 발견했고, 그보다 더 뜻밖의 근사한 발견들이 이어졌다. 세렌디피티라는 단어는 18세기 영국의 문필가 호러스 월폴이 1754년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처음 사용됐다. 그는 페르시아 우화 '세렌딥의 세 왕자' 속 주인공들이 새로운 발견을 하듯 자신도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취지의 글을 쓰면서 세렌딥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했다. 우화 속 왕자들이 스리랑카 출신이었는데, 이 나라의 이름은 실론이다. 실론의 페르시아식 지명이 세렌딥이다. 월폴은 세렌집에 '-ity'를 붙였다. 세렌디피티라는 단어는 우연을 뜻하지만, 총명하고 기발한 발견을 일컫는 단어로 영미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됐다.
(1) 아기 바다거북이와의 조우
스리랑카에서 우연히 만난 경이로운 발견 다섯 가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바다거북.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 바다거북의 말캉거리는 앞지느러미와 허우적대는 느낌이라고 말해야겠다. 세계적 멸종 위기인 바다거북을 함부로 만진다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로 불법한 행위가 아니다. 위기에 빠진 바다거북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부화장’(hatchery)에선 가능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7종의 바다거북 중 무려 다섯 종류가 인도양에 면한 스리랑카의 남쪽 바다에 올라와 모래를 파고 알을 낳는다. 바다거북은 그동안 남획돼왔다. 해파리를 잡아먹는 특성 때문에 종종 바다에 떠다니는 비닐봉지와 해양 플라스틱을 해파리로 오인하고 섭취하는데, 뱃속에 잔존한 해양 플라스틱의 부력으로 바다에 가라앉지 못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한다. 상어 같은 거대 포식 동물의 먹이가 되거나 바다에 표류하다가 모터보트, 선박 프로펠러에 찢기는 등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스리랑카의 남해안에는 여러 사설 단체가 운영하는 부화장이 있다. 상처 입거나 다친 바다거북을 구조해 안전하게 치료한 뒤 바다로 되돌려 보내거나 바닷가에 산란한 알을 수거해 안전하게 부화시켜 3개월간 키운 뒤 방사한다. 말캉거리는 1개월 된 바다거북을 만져보면 이 사랑스러운 동물에 대한 인류의 오만한 태도를 깊이 반성하게 된다.
(2) 트로피칼 모더니즘 건축가의 흔적
두 번째 세렌디피티는 스리랑카가 자랑하는 건축가 제프리 바와다. 스리랑카에서 볼 것은 불교 유적, 차(tea), 바다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이가 트로피컬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바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스리랑카를 방문한다. 현지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바와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여덟 살에 건축가가 됐다. 자신의 고향 스리랑카의 전통 양식과 서구 모더니즘을 결합해 매우 독특하고 분명한 미감을 가진 매력적인 건축물을 많이 남겼다.
그의 주된 활동지였던 콜롬보 시내에는 생전에 세 개의 집을 이어 붙여 개축한 생가 ‘제프리 바와의 집’과 현재는 갤러리 카페가 된 그의 옛 사무실이 남아 있다. 바와의 생가 3층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는 한 가족이나 커플이 머무를 수 있도록 준비돼 있다. 대기자 명단이 1년 치가 밀려 있다고. 콜롬보 도심의 연못 위에 지은 시마말라카 사원도 도심 투어의 핵심 기착지이니 꼭 들러보길. 스리랑카에는 바와가 조경가인 그의 형과 합작한 프로젝트가 많이 남아 있다.
(3) 최고급 밀크티에 버틀러의 미소 한스푼
스리랑카하면 실론티, 실론티는 곧 스리랑카의 다른 이름이니 차를 빼고 스리랑카를 얘기할 순 없다. 스리랑카의 세 번째 세렌디피티는 그냥 차가 아니라 밀크티라고 해야겠다. 스리랑카의 최고급 홍차가 생산되는 1200m 고지 누와라엘리야에 있는 실론티의 대표 브랜드 ‘딜마’의 ‘티 트레일스 로지’에 도착했다. 영국식 차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니 애프터눈 티도 그 서비스에 포함돼 있는데, 고산 지역의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진 고즈넉한 차밭 풍경을 바라보며 서늘한 기후의 방갈로에서 마신 밀크티는 그야말로 진정한 세렌디피티였다. 사실 밀크티는 최상품 차를 즐기는 방식은 아니다. 차 문화를 완성한 영국에서도 모든 사람이 최고급 품질의 차를 맛볼 수는 없으니 잘게 부순 찻잎으로 오래 우린 진한 차를 더 맛있게 소비하기 위한 차선책이었다. 하지만 티백에 담기지 않은 신선한 실론티에 우유를 섞은 밀크티는 견고한 균형감을 바탕으로 찻잎의 다양한 맛이 미묘하게 층위를 이뤄 혀를 감동하게 했다. 차를 따라주는 버틀러의 유난히 빛나는 미소가 그 맛을 더 풍부하게 했다. 어쩌면 궁극의 밀크티엔 반드시 실론인의 미소가 한 스푼 담겨야 하는 것은 아닐까.
(4) 날것의 사파리 투어…야생으로의 초대
네 번째 경이로운 발견은 스리랑카 남동쪽 해변에 있는 얄라에서였다. 얄라국립공원 사파리는 전 세계 딱 두 군데밖에 없는 바다를 면한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다. 코끼리가 무리를 이뤄 모래로 덮인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표범으로도 유명하다. 최상위 포식자이며 야행성 동물인 표범은 얄라에 있는 와일드 코스트 텐티드 로지에 묵으면 하루 두 번 제공되는 무료 사파리 투어를 통해 조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을 울린 건 공작새였다. 밤새 이슬을 맞은 공작이 긴 꽁지깃을 드리우고 높은 나무에 앉아 젖은 날개를 말리는 우아한 자태를 본 일이 있는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눈에 아른거리는 장면이다.
(5) 향신료로 느끼는 혀끝의 감동
스리랑카의 마지막 세렌디피티는 향신료에 바탕을 둔 이곳의 음식이다. 뚝뚝을 타고 인산인해를 이룬 콜롬보의 스파이스 마켓을 지나며 이렇게 많은 향신료가 어디에 쓰일까 궁금했다. 여정의 마지막 날 와일드 코스트 텐티드 로지에서 바닷가 요리 교실에 참여했다. 맛있고, 향기롭고 소화도 잘되는 스리랑카 음식들은 산지에서 갓 생산된 향신료와 함께 풍요로운 맛의 복합체를 만들어낸다. 본래부터 알던 계피, 후추, 겨자 외에도 정향, 소두구, 육두구, 팔각 같은 별난 모양의 향신료들을 믿기지 않을 만큼 듬뿍 사용해 요리한다. 코코넛오일을 두른 팬에 통후추 몇 알을 뿌리자 팝콘 터지듯 반건조 상태의 통후추가 터졌다. 요리 교실이 열리는 바닷가 숲속 전체를 매력적인 풍미로 가득 채웠다. 놀라운 향기가 켜켜이 쌓이며 놀라운 식탁이 완성됐다.
섬나라인 만큼 가장 신선한 재료는 해산물이었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경험은 생선 카레다. 탱글탱글한 새우나 게를 사용한 요리는 크기가 시선을 압도했다. 스리랑카의 중심도시 콜롬보에서 시작한 게 요리 식당 ‘미니스트리 오브 크랩’에서는 머드 크랩을 가장 작은 0.5㎏에서 괴물 같은 크기의 크렙질라까지 크기별로 주문할 수 있다.
스리랑카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귀한 노동력을 공급해온 나라다. 여덟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고향을 떠나와 외로움과 추위를 이기며 험하고 고된 일을 도맡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스리랑카인이 꽤 많기 때문에 심심치 않게 환한 미소를 띤 채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스리랑카의 진정한 세렌디피티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콜롬보=한국신사 이헌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