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술과 맛있는 음식의 특징은 시간과 재료의 조화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숙성과 블렌딩이다. 술이 익어가는 과정과 재료가 섞이는 과정이 마치 작곡과 같다. 술이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시간과 서로 다른 술이 마스터 블렌더의 혀에 따라 섞여서 특별한 블렌디드 위스키가 탄생하는 시간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향’(響·울릴 향)과 같다.
최근 오랜만에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이유와 의미가 다르겠지만 많은 지휘자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향곡 레퍼토리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구동성으로 브람스 교향곡 1번을 꼽는다. 이 곡은 열정과 불안함 그리고 마주친 운명에 대한 고뇌, 평화와 행복을 통해 희망을 꿈꾸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시작부터 완성까지 21년이 걸렸는데, 여기에는 브람스의 시간과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에게도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오랜 시간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프로페셔널 교향악단과 함께한 음악회에서 이 교향곡을 처음 지휘했다. 흥미롭게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하모니처럼 맛과 향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위스키 마스터 블렌더의 세계를 알게 된 계기, 그리고 위스키의 맛을 즐기게 된 계기 역시 브람스 교향곡 1번이었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일본에서 열리는 해외 콩쿠르에 나갔을 때 우연한 기회로 소중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콩쿠르를 마친 뒤 산토리홀에서 일본의 지휘 거장 도야마 유조(NHK 교향악단 종신 지휘자)가 이끄는 NHK 교향악단의 브람스 교향곡 전곡 연주가 있다는 포스터를 봤다. 대학교 1학년 때 그분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던 터라 반신반의하면서 연락을 시도했다. 설마 했는데 마에스트로는 바로 연락을 주었고 리허설과 연주회에 초대했다.
연주를 다 보고 작별 인사를 위해 무대 뒤로 찾아가니 마에스트로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식사 자리에 초청했다. 마에스트로의 단골집인 유서 깊어 보이는 일본 전통 가옥에서 훌륭한 음식과 청주 등을 즐기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수한 이야기를 나눴다. 마에스트로는 잠시 생각을 멈추곤 위스키를 주문했다. 20대 초반 청년이 처음 경험해 본 좋은 위스키의 향은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코끝에서 맴돈다. 산토리가 만든 히비키였다. 산토리홀에서 연주한 뒤 모인 자리이고 마침 산토리홀 관계자도 합석한 자리였기에 그저 마에스트로의 재치라고 생각했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여러 개성 있는 그레인 위스키와 몰트위스키를 조화롭게 섞어서 제조한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 소리 밸런스를 조화해 울리게 하거나, 조향사가 여러 향을 조화해 새로운 향을 탄생시키는 과정과 같이 위스키 마스터 블렌더가 창조해내는 것이다.
산토리사가 창립 90주년을 맞이한 1980년대 말, 음악을 사랑하는 사지 게이조 회장은 와인 포도밭에서 영감을 받아 산토리홀을 지었고, 새로운 위스키인 히비키를 출시했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이나토미 고이치 마스터 블렌더는 브람스 교향곡 1번 4악장을 모티브로 이 위스키를 블렌딩했다고 했다. 마에스트로는 이나토미 마스터 블렌더는 정말로 오감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만약에 그가 지휘를 했다면 엄청난 음악가가 됐을 것이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그날의 대화와 그 시간의 냄새와 소리, 맛은 20대 초반의 나에게 예술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낭만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고 나의 시간에 또 다른 지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