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이재묵]한국 정치의 고질병 ‘단일화 의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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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철학 조율 없는 ‘표 계산 기술’ 또 등장
1표라도 많으면 승리에 전략 결집 유혹 커
대통령제 국가 어디서도 찾기 힘든 K단일화
폐단 없애려면 결선투표 등 정치 개혁 절실

이재묵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재묵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6·3 대선을 24일 앞둔 상황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와 한덕수 전 국무총리 간 후보 단일화 추진이 볼썽사납게 이어지고 있다. 단일화의 정치적 명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채 파열음만 터져나오는 협상을 생중계로 지켜보는 유권자들은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대선은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헌정 중단 사태 이후 치러지는 선거다. 옛 여당 후보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헌정 위기를 자초한 정권의 일원으로서 깊이 성찰하는 태도이며, 국민 앞에 유감을 밝히고 정치적 책임을 통감하는 진정 어린 모습이다. 유권자들이 보려는 것은 과연 이 세력이 정권을 다시 이어갈 자격이 있는가이지, 표 계산의 기술이 아니다.

이번 단일화 논의는 방향도, 과정도 잘못됐다. 국정 철학이나 정책 비전의 조율 없이, 시작부터 오직 진영의 승리를 위한 수적 결합이라는 목적만 부각됐다. 정당 지도부가 당내 민주주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선에서 선출된 자당 후보에게 무조건적 단일화를 강요하고 있다. 여론조사를 이용한 압박성 단일화 추진 역시 절차적 정당성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경선 결과를, 단 한 번의 여론조사로 뒤엎으려는 시도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최근 동아일보 여론조사에서 중도층의 41.3%가 단일화에 반대한다고 응답했는데, 이는 이러한 정치공학적 ‘묻지 마 단일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그런데도 왜 한국에서는 대선 때마다 후보 단일화가 여지없이 등장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 정치 특유의 지형과 제도적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대선은 단순다수제를 채택해 1표라도 앞서면 승자가 된다. 진영 내 표가 분산되면 정권을 빼앗기기 십상이라 표 계산에 따른 ‘전략적 결집’이 반복되기 쉬운 구조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후보 단일화가 정권의 향방을 바꾼 경우가 적지 않다. 1997년 김대중-김종필의 DJP 연합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냈고,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중도층 결집의 효과를 극대화해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최근 2022년에도 윤석열-안철수 단일화는 0.73%포인트 차의 접전에서 보수 표 결집에 기여했다. 반면 민주화 이후 첫 직선제 대선이었던 1987년 김영삼 김대중 두 야권 후보의 분열은 노태우 정권 창출을 불러왔고, 이는 정치권에 마치 후보 단일화 무산이 주는 교훈처럼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진보든 보수든 정권 유지 또는 탈환을 위해 단일화의 유혹에 빠지며 이번처럼 단일화가 유일한 선거 전략인 양 모든 것을 거는 상황까지 오는 것이다. 그러나 단일화 그 자체가 언제나 성공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명분도, 원칙도, 감동도 없는 단일화는 중도층의 정치적 이탈을 심화시킨다. 특히 여론조사 수치만을 앞세운 일방적인 결합은 정치를 조합 가능한 기획상품처럼 보이게 할 뿐, 유권자에게 신뢰를 살 수 없다. 더욱이 단일화가 반복될수록 그 효과도 점차 떨어지고, 단일화 논의 자체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된다.

다른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이런 후보 단일화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처럼 양당제가 정착된 국가는 예비선거를 통해 각 당이 하나의 후보를 내기 때문에 본선에서는 단일화 논의 자체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이다. 물론 2004년 대선처럼 랠프 네이더와 같은 영향력 있는 제3후보에게 유권자들의 사퇴 압박이 가해지는 예는 있었지만, 단일화 자체가 주요 정치 의제로 부상하는 사례는 지극히 드물다. 또 중남미의 칠레, 코스타리카, 우루과이 같은 대통령제 국가는 다당제이지만 결선투표제를 운영한다.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얻지 못하면 1, 2위 후보가 다시 경쟁하는 구조라 사전 단일화 대신 탈락 후보의 지지 선언 형태로 자연스러운 연대가 이뤄진다.

결국 한국처럼 결선투표가 없는 나라에서는 대선 때마다 단일화 압력이 제도 밖에서 강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의 단일화 의존증을 탈피하고, 원칙 없는 단일화 논의의 폐단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 개혁이 절실하다. 대선에 결선투표를 도입하는 것은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유권자 과반의 지지를 받은 후보가 선출되고, 정당과 후보 간의 정책 연대가 제도적으로 유도될 수도 있다. 물론 결선투표 도입은 헌법 개정이 필요한 과제인 데다 거대 양당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권자의 대표성을 높이고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밀실 단일화’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정치 개혁은 단일화의 기술이 아니라 제도의 정비에서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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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묵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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