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현장에서 과거에는 없었던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관세청은 올해 ‘무역안보조사팀’을 신설했다. 중국산을 국산으로 둔갑해 수출하는 우회수출 적발액은 2024년 348억원에서 2025년 4573억원으로 13배 이상 폭증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는 자국에서 수출되는 물품의 원산지 허위신고에 무관용 원칙을 선언하고 단속 체계를 전면 강화했다. 지난 5월 베트남도 자국의 원산지증명을 국가기관으로 일원화하겠다고 나섰다.
과거 원산지 단속은 수입국 세관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출국 스스로가 자국을 떠나는 물건의 원산지를 단속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답은 원산지 제도 100년의 역사 안에 있다.
원산지는 원래 ‘낙인’으로 출발했다
원산지 제도는 공정한 무역 질서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수입국이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해 외국 제품에 찍는 낙인으로 출발했다.
1887년 영국이 독일산 수입품에 ‘Made in Germany’ 표시를 의무화한 것이 기원이다. 외국산이라는 사실을 소비자에게 경고해 소비를 억제하려는 것이었다.
1930년 제정된 미국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수입물품에 삼중 표시의무를 부과했다. 일본산 인형이 작은 판지 상자에 담겨 있고, 그 상자 100개가 다시 큰 외부 목재 케이스에 포장되어 수입될 경우, 인형 본체와 작은 판지 상자, 그리고 외부 케이스 각각에 모두 ‘Made in Japan’이 표시되어야 했다.
무역 규범으로 자리잡은 원산지
2차 세계대전 후 각국은 보호무역이 결국 전쟁을 불렀다고 반성했다. 1947년 출범한 GATT는 그 제도적 산물이었다. 관세를 낮추되 모든 나라에 똑같이 낮춰라. 최혜국대우 원칙이 핵심이었다. 특정국에 불이익을 주는 것도 금지했다.
이상만으로 각국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으므로 예외를 인정했다. 특정 국가 간에 관세를 없애는 자유무역협정(FTA)은 완전자유무역의 이상 실현을 위한 일종의 실험으로 허용했다. 특정국가와의 불공정무역을 시정할 수 있도록 반덤핑관세·상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FTA 특혜관세는 어느 나라 물건에 적용할 것인가. 반덤핑관세는 어느 나라 물건에 부과할 것인가. 이 모든 질문의 답이 원산지였다. 원산지는 그렇게 무역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특정 국가 간 관세를 없애기로 한 FTA 특혜 원산지 기준은 완전한 규범으로 작동했다. 세번변경 기준, 부가가치 기준, 특정 공정 기준이 품목별로 세밀하게 규정됐다. 이 기준을 준수하는 자에게는 예측 가능성과 명확성이 보장됐다.
반면, 나머지 영역에 속하는 비특혜 원산지 기준은 끝내 국제적으로 통일되지 않았다. 1995년 WTO 원산지규정협정이 체결됐지만 선언에 그쳤고, 30년이 지나도록 각국은 자국법으로 제각각 운영하고 있다.
이제 피아식별장치가 되어버린 원산지
지금의 보호무역주의는 보호무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1930년대와는 본질이 다르다. 과거엔 남은 모르겠고 우선 나부터 살고봐야 한다는 심정으로 무역장벽을 쌓았다면, 지금은 공세적으로 특정 국가를 공급망에서 배제한다.
이제 원산지는 적과 아군을 가르는 피아식별장치다. 미국은 중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공급망에 중국 자본이 일정비율을 넘으면 보조금에서 제외한다. 위구르강제노동방지법(UFLPA)은 신장위구르자치구 생산품을 강제노동 제품으로 추정하고, 수입자가 반증하지 못하면 통관을 정지한다.
원산지를 중심으로 갈수록 복잡해지는 피아식별
문제는 이러한 규제가 비특혜원산지를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같은 물품이라도 수출국과 수입국의 비특혜 원산지 판정기준은 다를 수 있다. 국제적으로 통일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원칙적으로 세번- HS협약에 따라 전 세계 모든 물품에 부여된 6자리 분류 코드-를 기준으로 판정하지만, 미국은 판례와 정성적 판단에 근거한다.
같은 물품이라도 수출국인 우리나라는 ‘한국산’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수입국인 미국은 ‘중국산’으로 해독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역으로 미국에서는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만한 물품을 우리나라는 원산지 세탁으로 처벌한 경우도 있다. 실제로 우리 법원이 이런 사안에서 무죄를 선고하기도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국은 이제 단순한 물리적 변형을 넘어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본의 국적과 원료의 출생지까지 따지고 있는 중이다.
원산지를 중심으로 한 피아식별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피아식별장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치러야 하는 비용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전장에서 피아식별 신호를 발신하지 못하는 병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원산지는 이제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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