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등 떨고있는 이들에 자비를” 호소한 주교…트럼프는 “좋은 기도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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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사람]

마리앤 버드 미국 워싱턴 교구 성공회 주교가 21일(현지 시간)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국가 기도회 예배를 집전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성소수자에 적대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비’를 당부했다. 워싱턴=AP 뉴시스

마리앤 버드 미국 워싱턴 교구 성공회 주교가 21일(현지 시간)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국가 기도회 예배를 집전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성소수자에 적대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비’를 당부했다. 워싱턴=AP 뉴시스

“주님의 이름으로, 대통령께 부탁드립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다음날인 21일(현지 시간) 수도 워싱턴의 국립 대성당에서 열린 ‘국가기도회’를 인도한 마리앤 버드 성공회 미국 워싱턴 교구 성공회 주교(66)가 트럼프 대통령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그는 “당신은 어제 취임사에서 (지난해 대선 유세 중 암살 시도를 겪었을 당시) ‘신의 손길을 느꼈다’고 말했었죠”라고 상기시키며 당부했다. 이어 “민주당, 공화당, 중도의 가족에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자녀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목숨을 위협받기도 합니다.”고 강조했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를 초월해 열린 이 기도회는 대통령 취임 행사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버드 주교의 발언은 전날 취임 선서를 마친 트럼프 대통령이 즉각 조 바이든 행정부의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을 폐기하고 성소수자 등에 적대적인 정책을 예고한 것을 겨냥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 여사, J D 밴스 부통령(뒷줄 왼쪽부터) 등이 21일(현지 시간)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국가 기도회에 마리안 버드 성공회 주교(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연단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 여사, J D 밴스 부통령(뒷줄 왼쪽부터) 등이 21일(현지 시간)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국가 기도회에 마리안 버드 성공회 주교(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연단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따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버드 주교는 연설을 이어갔다. 그는 “농작물을 수확하고, 사무실을 청소하고, 닭 농장과 육류 포장 공장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병원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들. 이들이 미국 시민이 아니거나 적절한 서류를 갖추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하지만 대다수 이민자는 범죄자가 아니라, 국가에 세금을 내며 우리의 좋은 이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취임사와 수많은 행정 조치로 강조한 ‘불법 이민자 강력 퇴출’과 ‘국경 보안 강화’를 뚜렷하게 지적한 내용이었다.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당시부터 이어진 취임 기도회는 일반적으로 정치색이 옅고 신임 행정부를 위한 축복의 메시지가 나오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뉴욕타임스(NYT)는 “버드 주교의 연설은 주목할 만큼 직설적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WP) 또한 “과거 취임 기도회를 이끈 성직자들이 대부분 대통령에게 우호적 태도를 보였던 것과 달리, 버드 주교는 오랫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에 우려를 표해왔다”고 전했다.

그는 2017년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한 뒤 반(反)트럼프 성향의 ‘여성 행진’ 시위에 힘을 보탰다. 2년이 지난 2019년에는 천주교 지도자들과 함께 “미국은 언제쯤 품위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공개 성명에 동참했다.

2020년 5월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관의 목조르기로 숨졌다. 이에 항의하는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Black Lives Matters)’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자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최루탄 등을 동원해 백악관 인근 시위대를 해산했다. 버드 주교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시위대 진압 후 성경을 들고 ‘인증사진’을 찍은 행동을 두고 “폭력을 조장한다”며 분노를 표했다.

이날 두 번째 취임 기도 연설과 관련해 버드 주교는 NYT에 “나는 대통령을 질책하려던 게 아니라, ‘이 나라가 당신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며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은 자비”라고 강조했다. 그는 WP에 “설교문 초안을 고치고 또 고쳤다”며 “무거운 책임이었지만 겸손함과 기도로 받아들였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끝까지 관용을 당부했다. 버드 주교는 “신은 우리에게 낯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모두 한때 이 땅에서 낯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며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기 위해 조롱이나 무시, 악마화를 거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연설이 대통령의 마음에는 제대로 닿았을 지는 알 수 없다. ABC 방송 등은 트럼프 대통령이 기도회 내내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고, 찬송할 때만 고개를 들어 까닥였다고 전했다.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 여사 또한 하품을 참는 모습이 목격됐고 JD 밴스 부통령은 간혹 눈썹을 치켜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도회 후 취재진과 만나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면서 “좋은 기도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석연찮은 반응을 보였다. 친(親)트럼프 성향의 마이크 콜린스 공화당 하원의원은 소셜미디어 X(엑스)에 “이 설교를 한 사람은 추방 명단에 추가되어야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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