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온 에릭 루와 빈센트 옹... 쇼팽을 다르게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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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토중래. 에릭 루에겐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그랬다. 2015년 이 대회에서 얻었던 4위도 훌륭한 성과였다. 그럼에도 맘에 차지 않아 10년 뒤 같은 대회에 다시 도전했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압박감이 컸지만 결과는 우승. 그는 지난 26일 WCN이 주최한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에서 한국 관객들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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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부터 결선 무대 재현

루의 최근 한 달은 그 어느 피아니스트와 비교하기가 어려울 만큼 바빴다. 지난달 21일 5년 마다 열리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그는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미국을 돌며 공연했다. 우승 후 첫 아시아 무대였던 한국에서도 숨 가쁜 일정이 이어졌다. 21일 KBS교향악단과 협연한 뒤 22·23·25일 잇따라 리사이틀을 치렀다. 피로가 누적됐을 이번 방한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26일에도 그는 우승자로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쇼팽 레퍼토리로 채운 이번 공연은 지난달 쇼팽 콩쿠르에서 개성 넘치는 연주로 5위에 올랐던 빈센트 옹과 함께했다. 옹이 1부를, 루가 2부를 맡는 방식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오른 옹은 합창석까지 가득 채운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폴로네이즈 환상곡 내림가장조(작품번호 6)를 시작했다. 이번 콩쿠르 결선에서 모든 참가자들이 연주했던 곡이다. 초장 터치부터 옹은 남달랐다. 그의 손길은 제법 단단하면서도 온기가 감도는 소리를 냈다. 이따금 다른 건반이 눌리거나 소리가 튀기도 했지만 옹은 몰입감을 잃지 않으며 관객들을 쇼팽 콩쿠르 결선 현장으로 데려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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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은 야상곡 나단조(작품번호 62 중 1번)로 몽글몽글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건반을 간지럽히듯 가볍게 두드릴 땐 개울가에 앉아 발을 흔들며 조그만 물장구를 내는 듯했다. 반대로 에너지를 쏟아낼 땐 손을 수직으로 내리꽂은 뒤 건반을 핀치로 뽑듯 손가락을 튕기길 반복했다. 여느 연주와는 강세를 다르게 두는 그만의 해석도 흥미로웠다. 이어 마주르카(작품번호 41)와 폴로네즈 내림가장조(작품번호 53)를 연주한 그는 앙코르로 전주곡(작품번호 28 중 24번)과 슈만의 아라베스크를 연주했다. 그가 풀어낼 슈만은 어떤 분위기일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자리였다.

지난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위너스 콘서트'에서 연주한 빈센트 옹. /사진출처. WCN.

지난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위너스 콘서트'에서 연주한 빈센트 옹. /사진출처. WCN.

쇼팽 특유의 부드러움 살린 뱃노래

공연 2부는 우승자인 루의 무대. 피아노는 결선에서 쓰던 파지올리 대신 스타인웨이였다. 그가 건반을 두드리며 야상곡 올림다단조(작품번호 27 중 1번)를 연주하자 결선 유튜브 영상으론 쉽게 체감하지 못했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났다. 앞서 옹이 그렸던 쇼팽은 높게 솟은 나무들로 빽빽한 숲과 같았다.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나무들은 그 간격이 불규칙했다. 밀림 속을 오가며 나무들을 타는 것 같은 재미가 음악에 있었다. 루가 그린 숲은 나무의 간격이 더 넓었다. 그래서 숲 안에서도 먼 경치가, 야상곡에서 떠올릴 법한 잔잔한 호수가, 구름에 흔들리는 달이 잘 보였다. 나무들의 높이는 고르게 달라 부드러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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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의 뱃노래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 그는 조금 건조했던 공연장 환경도 살릴 줄 알았다. 뱃머리에서 갈라진 물결은 공연장 벽에 닿아 소리로 파문을 냈다. 그 울림이 다하기 직전 루는 여운이 가시지 않도록 다음 소리를 냈다. 같은 동기를 거의 같은 강세와 빠르기로 반복할 땐 유려함 속에서 간결함을 살리는 위트가 있었다. 폴로네즈 내림나장조(작품번호 71 중 2번)와 소나타 2번에선 혼신을 쏟았다. 3악장인 장송 행진곡을 연주하기 직전 그는 이마에 흘린 땀을 닦고 10초간 정적을 지켰다. 이렇게 관객들의 시선을 자신의 손끝에 집중시킨 뒤 만들어 낸 소리는 깊고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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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로 연주한 왈츠 두 곡엔 유려함과 경쾌함이 공존했다. 관객들의 환호가 계속되자 그는 세 번째 앙코르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시작인 아리아를 들려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루와 옹이 함께 무대에 올라 박수를 받았을 땐 서로의 연주 스타일 만큼이나 둘의 키 차이가 두드러졌다. 이들은 사인회로 팬들에게 한 번 더 인사했다. 루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투어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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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위너스 콘서트'에서 열린 사인회. /사진출처. WCN.

지난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위너스 콘서트'에서 열린 사인회. /사진출처. WCN.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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