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을 문화허브로 바꾼 '프랑스의 이마트' 르클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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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와 회화작가 등 13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동물?!’ 전시. /ⓒNathalie Savale, ⓒFHEL

조각가와 회화작가 등 13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동물?!’ 전시. /ⓒNathalie Savale, ⓒFHEL

“재단의 근간은 협력입니다. 걸작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퐁피두센터, 루브르박물관 같은 기관 및 민간 컬렉터들과의 신뢰와 유대가 필수죠. 전문성을 바탕으로 파트너십을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강점입니다. 일류 작품과 최고 수준의 큐레이터를 초빙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고, 그 혜택을 관람객에게 돌려주는 일이죠”

유통 그룹이 걸작을 한데 모아 대규모 전시를 기획하는 일은 흔치 않다. 세계적인 기관들과의 협업부터 예술 민주화를 위한 대담한 행보까지 르클레르가 쌓아온 남다른 문화적 저력과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봤다.

브르타뉴의 한적한 마을 랑데르노에 자리한 엘렌과 에두아르 르클레르 재단. /ⓒStudio Dirou, ⓒFHEL

브르타뉴의 한적한 마을 랑데르노에 자리한 엘렌과 에두아르 르클레르 재단. /ⓒStudio Dirou, ⓒFHEL

1949년 설립된 프랑스 대표 유통 그룹 르클레르는 전국에 700여 개 매장을 뒀다. 2012년 이들은 브르타뉴 랑데르노에 문화 허브를 구축했다. 지역 사회와 상생하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다. 르클레르는 2011년 창업자 부부의 이름을 딴 엘렌과 에두아르 르클레르 재단을 설립한 뒤 이듬해 첫 매장이 있었던 곳에 1200㎡ 규모의 복합 문화 시설을 마련했다. 17세기 초에 지어진 카푸신 수도원을 개조한 이곳에서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호안 미로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회화뿐만 아니라 사진, 조각, 만화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전시와 워크숍, 공연 등으로 대중과 소통한다.

올해 이 재단은 ‘동물!?(Animal!?)’전을 11월 초까지 열어 화제를 모았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예술사의 보편적인 주제 중 하나인 동물과 인간, 문명과 야만, 이성과 본능 사이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탐구했다. 현장에서는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 입체파의 일원인 마리 로랑생을 포함해 130여 명에 이르는 유명 및 신진 작가의 개성 강한 작품이 예상치 못한 전개로 펼쳐졌다. 이곳에서 현대 예술의 후원자이자 컬렉터이며, 르클레르의 회장인 미셸에두아르 르클레르를 만났다.

오른쪽 위 ① 미셸에두아르 르클레르 회장. /ⓒFHEL, 오른쪽 아래 ② 17세기 초 지어진 카푸신 수도원을 개조한 복합문화공간. /ⓒFHEL, ③·④ ‘동물?!’ 전시 전경. /ⓒNathalie Savale, ⓒFHEL

오른쪽 위 ① 미셸에두아르 르클레르 회장. /ⓒFHEL, 오른쪽 아래 ② 17세기 초 지어진 카푸신 수도원을 개조한 복합문화공간. /ⓒFHEL, ③·④ ‘동물?!’ 전시 전경. /ⓒNathalie Savale, ⓒFHEL

▷르클레르의 본고장인 랑데르노는 어떤 곳인가요.

“인구 1만6000여 명의 소도시 랑데르노는 ‘농업협동조합 운동’의 발상지입니다. 문화 공간을 파리가 아닌 이곳에 세운 것은 서로 돕는 문화가 일상인 지역 구성원들에게 수준 높은 예술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각종 로컬 행사와 함께 수많은 방문객을 불러 모으고 있으며, 프랑스 북서부 전역의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유통 그룹의 경영과 비물질적 가치를 좇는 재단의 운영은 어떻게 시너지를 내고 있나요.

“르클레르는 전국 700개 이상의 독립 소매업체 소유주들로 이뤄진 연합체입니다. 저는 리더로서 이들을 단일한 목표로 결집시키는 일을 하고 있죠. 2008년 새로운 후원법이 제정되면서 르클레르의 독특한 협동조합 구조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행사를 지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 생산자로서 직접 기획 및 제작하는 것이 가능해졌죠. 상업적 성공과 환원, 문화 접근성과 문화 상품의 대중화는 경영자로서의 지향점과 잘 맞닿아 있습니다.”

▷르클레르그룹이 유통을 넘어 문화 생산의 주체가 된 점이 흥미롭습니다.

“재단은 2011년 당시 부모님과 ‘르클레르 운동’의 정신을 공유하는 이들이 공동 설립했습니다. 이 운동은 소비자 보호와 커뮤니티에 대한 공헌을 사명으로 삼은 협동조합의 형태입니다. 아버지는 식품에만 국한하지 않고 책, 음반 같은 문화 콘텐츠에도 이를 적용하려 했습니다. 매장 내 문화 섹션인 ‘에스파스 퀼튀렐(espaces culturels)’도 그 일환이었고, 문화 행사를 지원 및 창설하는 방식으로 행동에 옮겼습니다.”

▷반드시 고수하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문화와 예술의 매개자로서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폭넓은 취향을 포용하려는 것이죠. 품질은 최상위로 유지하되 입장료는 평균 4유로로 저렴하게 책정했습니다. 전시당 최대 20명의 가이드를 상주시켜 관객들이 예술을 편안하게 즐기도록 합니다.”

▷이런 원칙을 실행하기 위해 협력자들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는데, 문화부 장관을 비롯한 문화예술계 전문가와의 교류가 활발하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재단의 근간은 협력입니다. 걸작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퐁피두센터, 루브르박물관 같은 기관 및 민간 컬렉터들과의 신뢰와 유대가 필수죠. 전문성을 바탕으로 파트너십을 이끌어 내는 것이 우리의 강점입니다. 일류 작품과 최고 수준의 큐레이터를 초빙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고, 그 혜택을 관람객에게 돌려주는 일이죠.”

▷이 모든 활동을 관통하는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문화’라는 문구가 재단 공식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는데요. 그 의미를 좀 더 설명해 주세요.

“르클레르는 ‘더 저렴한 가격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판매한다’라는 간단하면서도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출발했습니다.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문화라는 철학 역시 창업이념과 동일한 맥락이죠. 문화예술 콘텐츠를 합리적으로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모으고, 이것을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일을 포괄합니다. 이는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룹이 비식품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다각화하고 있는데,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단의 새로운 전략은 무엇인가요.

“저희는 그간 축적한 명성을 토대로 활동 범위를 확대해 나갈 예정입니다. 그 일환으로 르클레르 운동의 역사가 담긴 ‘라 에(La Haye) 저택’에 본부를 두고, 조각공원을 조성해 창의적인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찾아가는 전시’ 이니셔티브로 대중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합니다.”

▷열정적인 예술 애호가로서 이제껏 선보인 전시에 개인의 취향도 어느 정도 투영됐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고 독서를 즐깁니다. 어머니 덕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다양한 문화적 표현을 접할 수 있었죠. 소르본대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미셸 세르, 앙키 비랄 같은 인물들을 만나며 사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특히 만화를 향한 관심은 공공기관이나 주류 미술계가 만화를 외면하던 시절에도 계속됐습니다. 2013년 첫 만화 전시를 연 데 이어 퐁피두센터와의 공동전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죠. 올겨울과 내년 봄까지는 그르노블박물관과 협력해 만화를 테마로 하는 기획전을 개최할 계획입니다.”

▷상업성도 물론 고려 대상일 테지만 미학적 의의나 실험적인 측면은 기획에 어떤 식으로 반영하나요.

“저희는 설립 초기부터 모험적인 콘텐츠를 추진해 왔고, 앞으로도 기조를 유지할 것입니다. 2012년 몰입적인 조명 설치전을 완성한 ‘얀 케르살레’와 2016년 파리 국립 오페라와의 파격적인 전시, 그리고 지난 10년간 현대 예술가들의 공연인 프롤롱가시옹도 좋은 예입니다.”

브르타뉴=유승주 미술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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