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생명과학의 융합으로 탄생한 ‘인공 단백질’이 질병 치료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인류는 이제 단백질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시대를 넘어, ‘창조’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인공 단백질이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단백질을 처음부터 설계하거나, 기존 단백질 구조를 목표에 맞게 정밀하게 재설계한 분자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단백질 공학이라 해도 주로 자연에서 발견된 단백질에 약간의 변형을 주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최근 방대한 생물학적 데이터베이스와 AI 알고리즘의 결합으로 아미노산 서열과 3차원 구조를 원하는 대로 ‘맞춤 제작’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마치 기성복을 약간 수선하던 방식에서, 고객의 체형과 목적에 맞춤 의상을 디자인하는 것과 같은 근본적 차이다.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는 이 혁명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수십 년간 생물학계의 난제로 여겨졌던 ‘단백질 접힘 문제’를 AI로 해결함으로써, 단백질 구조 규명에 소요되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과거에는 X선 결정학이나 극저온전자현미경(Cryo-EM) 분석에 의존해 단백질 한 개의 구조를 밝히는 데만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렸지만, 이제는 단 몇 시간 만에 정확도 높은 구조 예측이 가능해졌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구글, 메타, 오픈AI 등 글로벌 기술 기업들은 거대 언어 모델(LLM)의 원리를 단백질 설계에 적용하고 있다. 놀랍게도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하는 AI가 아미노산 서열이라는 ‘생명의 언어’도 해석하고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기업이 개발한 모델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특수한 기능과 안정성을 갖춘 단백질을 며칠 만에 설계해내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기존 재조합 단백질 치료제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특정 질환 표적과 결합하는 핵심 부위를 유지하면서도 반감기 연장, 투과력 강화, 생산 공정 최적화까지 고려한 ‘다목적 맞춤형 단백질’의 설계가 현실화되고 있다. 특히 암 치료 분야에서는 조직 침투력이 뛰어난 소형화된 항체 모방 단백질을 설계해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는 혁신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의 항체 치료제는 크기가 커서 종양 내부 깊숙이 침투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는데, 인공 단백질 기술은 이러한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자가면역질환, 희귀질환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자가면역질환의 경우, 면역 반응의 특정 경로만을 선택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전체 면역 기능은 보존하면서도 병적인 자가면역 반응만을 억제하는 정교한 접근이 가능해진다. 개발 기간과 비용을 크게 단축함으로써 경제적 장벽을 낮추고 더 많은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치료 옵션을 제공할 가능성을 높인다.
모더나, 화이자, 로슈 등 이러한 잠재력을 확인한 다국적 제약사들은 AI 바이오 스타트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거나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LG화학을 비롯한 국내 기업들 역시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해외 AI 기술 벤처에 전략적으로 투자하거나 자체 연구개발 역량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인공 단백질 기술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 전례가 부족한 만큼 예상치 못한 면역 반응이나 생산 공정상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구조의 단백질이 인체 내에서 장기적으로 안전한지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함께, 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효율적인 공정 개발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윤리적, 규제적 기준 마련도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