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영화 산업은 심정지 상태입니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이준동 나우필름 대표의 이같은 발언은 과장이 아니다. 차승재 프로듀서 역시 "평소라면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왔을 텐데, 지금은 상갓집 차림으로 왔다"고 덧붙였다.
지난 18일 부산 해운대구 영상산업센터에서 열린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포럼 비프는 '1996 플래시백: 한국 영화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를 주제로 진행됐다. 김이석 동의대 교수가 사회를 맡았고, 안시환 영화평론가, 김성훈 씨네21 디지털 본부장, 이준동 대표, 주유신 영산대 교수, 차승재 프로듀서, 한재덕 사나이픽처스 대표가 함께 자리해 한국 영화의 위기와 미래를 놓고 열띤 논의를 벌였다.
토론장에서 쏟아진 이 발언들은 지금 영화계가 처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코로나19 이후 5년째 이어지는 두 자릿수 마이너스 수익률, 원금조차 보장되지 않는 투자 환경, 붕괴 직전까지 몰린 극장 생태계. 영화인들의 증언은 이제 한국 영화를 더 이상 '위기'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때 한국 영화는 세계를 흔들었다. 1997년 '쉬리', '접속', '초록물고기',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로 시작해 2000년 '플란다스의 개', '공동경비구역 JSA', '박하사탕', '반칙왕', '춘향뎐'에 이르른다. 2003년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장화 홍련', '스캔들', '바람난 가족', '질투는 나의 힘', '지구를 지켜라'로 이어진 다양성과 개성의 물결은 충무로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당시 '웰메이드'라는 표현은 자연스레 통용됐다.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꿰찬 영화들이 연이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안시환 영화평론가는 "지금은 작품성과 대중성 중 하나만 남은 상황"이라고 했다.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같은 이름은 여전히 회자되지만, "업데이트되지 않는 감독 이름만 들리는 현실이 바로 위기의 징표"라는 지적이다.
한때 관객이 영화 한 편의 흥행에 열광하며 산업 전체를 흔들던 힘은 사라지고, 지금의 흥행작은 개별적인 성공에 그칠 뿐 산업 전체에 파급력을 주지 못한다. 한국 영화의 힘은 '감독의 개성과 예술성'에서 비롯됐지만, 지금은 상업적 성공만 좇는 규격화된 취향만 남았다.
팬데믹 이후 드러난 구조적 실패
김성훈 본부장은 냉정한 현실을 들이밀었다. 그는 "코로나 이후 5년 내내 두 자릿수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투자자들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며 "제작비는 치솟고 관객은 줄어들었으며, 극장 객단가는 낮아졌다. 지금은 천만 관객보다 백만 관객을 모으는 게 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극장의 몰락은 더 심각하다. 롯데컬처웍스와 메가박스중앙의 합병이 성사됐지만, 시장엔 기대감보다는 '멀티플렉스 시대가 이렇게 저무는구나'라는 탄식만 남았다. 팬데믹 시기 관객이 줄자 극장 푯값을 인상한 것이 관객을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김 본부장은 "앞으로는 손익분기점 150만 명, 제작비 30억~50억 원대 영화들이 주류를 이룰 것이며, 대규모 시장 확대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정부의 책임론도 쏟아졌다. 이준동 대표는 "정부의 실패가 한국 영화 몰락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팬데믹 시기 해외 주요국들은 영화산업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재정을 투입했지만, 한국은 극장을 오후 8시에 강제로 닫게 했다. 그 결과 관객의 발길은 뚝 끊겼다는 것이다.
내년 영화 분야 정부 예산안이 올해보다 669억원(80.8%) 늘어난 1498억원으로 확정됐다. 코로나19 팬데믹 긴급 지원이 편성됐던 2022년을 제외하고 역대 최대 규모다. 하지만 "산업을 살리기에는 의미 없는 금액"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제작자들은 보증 금고 설립, 손실 충당 펀드 등 실질적인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정부는 '산업적 구조 개편' 대신 이벤트성 지원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제작자들의 절망…"지금 영화계는 해외 OTT 머슴살이"
제작자들의 목소리는 더욱더 절망적이다. '살인의 추억' 등 한국 영화사에 남을 굵직한 작품을 제작한 차승재 프로듀서는 "관객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영화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영화계는 상갓집"이라며 "국제 OTT 기업들이 한국에서 1조 원 넘는 구독료를 거둬가면서도 세금도, 발전기금도 내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세계'를 제작한 한재덕 사나이픽처스 대표는 OTT와의 관계를 '머슴살이'에 비유했다. "저희는 소작농이 아니라 머슴"이라며 "OTT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수수료를 받으며 연명한다"고 했다. 그는 "저도 근사한 예술영화 좋아한다. 하지만 찍을 수 없다. OTT를 통해 작품을 제작하고 그렇게라도 벌어서 극장에 걸 작품을 기획, 개발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을 넷플릭스와 함께 제작하는 이준동 대표도 "해외 OTT와 협업하면 모든 권리를 빼앗기는 모욕적인 경험을 한다"며 "창작자들이 연대해 새로운 구조를 마련하지 않는 한 한국 영화의 미래는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주유신 영산대 교수는 "극장의 위기일 뿐 OTT는 창작자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며 "소비자로서 오히려 더 큰 감동을 OTT에서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작자들은 OTT는 창작자에게 자유가 아니라 예속을 강요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로벌 플랫폼들은 막대한 수익을 거둬가면서도 한국 영화산업에 환원하지 않고, 제작자들에게는 최소한의 수익만 남긴다는 비판이다. 산업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OTT 시대는 기회가 아니라 착취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경고다.
한국 영화 심폐소생 가능할까
현장의 영화인들이 공통으로 내놓은 해법은 분명하다. 바로 거버넌스 재편이다. 차승재 프로듀서는 "OTT에서 거둬가는 막대한 수익을 발전기금이나 펀드로 환원시켜야 한다"며 "영상산업 전체의 거버넌스를 새로 짜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훈 본부장도 "정부 부처가 방송·OTT와 영화를 구분해 개편하고 있다. 영화계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를 잡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안시환 평론가는 "한국 영화의 위기는 외부 충격이 아니라 내부 문제의 폭발"이라며, 이해관계를 넘어선 자발적 연합과 양보 없이는 재생의 길도 없다고 강조했다.
민규동 감독은 "다양성의 감소는 멸종의 신호"라며 "창작자의 생존이 곧 산업의 생존"이라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 기간에도 프랑스 예술영화가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던 사례를 들며, "예술성은 시대를 관통하는 불멸의 힘을 갖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양성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영화 산업은 곧 멸종을 맞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영화라는 이름이 사라져도 우리는 이야기를 하는 존재다. 위기 자체도 서사 아닐까." 민규동 감독의 말은 비장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한국 영화는 지금 '위기'가 아니라 '심정지' 상태다. 왜곡된 구조가 맞물려 영화산업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 영화인들이 입을 모아 "심폐소생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이유다. 영화계에서는 정부의 공적 개입, 거버넌스 재편, 다양성 회복이라는 세 축을 동시에 붙잡지 못한다면 한국 영화의 미래는 없다는 의견이 모인다.
부산=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