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영어로 발표할 자리에 있을 때 청중의 표정에서 은근한 기대감을 느낄 수 있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하길래 미국에서 교수로 일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발표가 시작된 지 불과 몇 초 만에 그 기대는 걱정으로 바뀐다. “도대체 이분, 어떻게 미국에서 살아남았을까?”
한국에서는 영어를 잘한다는 말을 듣기 어렵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는 종종 칭찬을 받는다. 물론 그 칭찬이 버터 바른 듯한 발음이나 유려한 표현을 막힘 없이 구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국에서의 박사 과정을 지도해주고 감사하게도 늘 나를 추천해 주는 지도교수님은 내 영어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권 박사의 영어는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명확한 영어란 무엇일까? 한 부부가 외국 휴양지에서 휴가 중 방 열쇠를 객실에 두고 와서 방문을 열 수 없게 됐다. 영어 실력에 자신이 있는 남편이 호텔 직원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Excuse me, I seem to have mistakenly left my room key in my room. If you have a master key, would you mind unlocking the door for us, please?”(실례지만, 제가 실수로 호텔 방 열쇠를 방 안에 두고 온 것 같습니다. 마스터키로 방문을 열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하지만 직원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옆에 있던 아내가 다급히 손을 저으며 외쳤다. “No key! No key!” 직원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방문을 열어줬다.
이처럼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화법을 나는 ‘노 키 영어’라고 부른다.
(드라마 ‘카지노’에서 최민식 배우가 연기한 차무식 캐릭터의 영어가 좋은 예다) 노 키 영어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간결함이다. 복잡한 설명 대신 상대방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사족은 덜어내고 핵심만 전해야 한다. 한참을 떠들었지만, 결국 “방 열쇠가 없다”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둘째, 억양이다. 답답한 마음에 “No key!”를 간절히 외친 것처럼, 말의 높낮이와 감정을 담은 비언어적 표현은 영어 소통에서 핵심이다. 억양 없는 단조로운 영어는 아무리 문법이 완벽해도 상대가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촌스럽게 들릴지라도 강조된 억양의 영어가 훨씬 더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셋째, 자신감이다. 내가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원어민인 당신은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는 당당한 태도가 필요하다. 말이 조금 서툴러도,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당당하게 전하면, 듣는 사람들은 그 내용에 더 집중하게 된다.
결국 글로벌 비즈니스 상황에서 원어민 수준의 유창함도 물론 도움이 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소통 능력이다. 한국 청중은 내 부족한 회화 실력을 걱정했지만, 지도교수님은 그보다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는 힘을 더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평생 영어 공부를 해왔지만 실력이 좀처럼 향상되지 않아 괴로웠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노 키 영어로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영어로 일하는 매일의 삶에 익숙해졌다. 내가 가진 멋진 생각을 명확하고 자신 있게 전달할 수 있다면 영어 실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충분히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침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하면 다양한 상황에서의 영어 표현을 연습할 수 있어 노 키 영어 훈련에 큰 도움이 된다. 실수해도 인내심을 갖고 몇 번이고 내게 맞는 새로운 ‘노 키’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AI의 도움으로 바벨탑이 무너진 이후 인류가 겪어온 언어 장벽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AI를 사용한 이후 확실히 예전보다 영어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들었다.
최근 관세 전쟁 여파로 미국으로의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이 가속화하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미국 시장에서의 비즈니스 기회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영어 울렁증으로 망설이고 있다면 ‘노 키 영어’로 문을 두드려 보자. 어쩌면 상상도 해보지 못한 기회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