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피의 피아니스트' 브론프만 "흔들릴 때마다 음악이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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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피아노.’ 2015년 10월 12일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찍힌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공연 사진에 붙은 짧은 문구다. 이날 피아노의 하얀 건반은 핏자국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67·사진). 공연 당일 날카로운 물체에 손가락이 심하게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그가 연주를 강행하다 생긴 일이었다. 연주 도중 수술 상처가 벌어져 건반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지만 브론프만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붉은 피의 피아니스트' 브론프만 "흔들릴 때마다 음악이 일으켜"

그는 3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피가 묻어나는 순간에도 연주를 멈춘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며 “음악이 모든 걸 이끌었고 관객, 오케스트라가 함께하고 있다는 믿음은 나를 포기할 수 없게 했다”고 말했다.

‘피의 명연(名演)’으로 잘 알려진 브론프만이 오는 21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는 리사이틀을 연다. 그는 “지난 50년간 부상, 까다로운 레퍼토리, 자기 의심의 순간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절 일으켜 세운 건 역시나 음악이었다”며 “마음 깊이 사랑하는 작품을 피아노로 만날 때 얻는 새로운 힘은 제 음악 인생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슈만의 ‘아라베스크’,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3번, 드뷔시의 ‘영상 제2권’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중 작곡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7번을 선보인다. 브론프만은 “드뷔시의 음악이 섬세하게 변화하는 빛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7번은 전시(戰時)의 폭발적 에너지와 강렬함을 지니고 있다”며 “드뷔시에 이어 프로코피예프가 연주될 때는 마치 음향적 충격파가 터져 나오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케스트라 협연이 다층적인 대화라면, 독주는 훨씬 더 개인적인 대화입니다. 작품에 담긴 섬세한 감정선과 분위기를 자유롭게 탐구하고, 청중과의 연결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브론프만은 빈필하모닉, 베를린필하모닉, 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RCO) 등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가 앞다퉈 찾는 피아니스트다. 1975년 명지휘자 주빈 메타가 이끄는 몬트리올심포니와 협연하면서 데뷔했고, 1991년 미국 에이버리 피셔 상을 거머쥐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97년엔 에사페카 살로넨 지휘의 로스앤젤레스필하모닉과 녹음한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전곡 음반으로 미국 최고 권위의 음악상인 그래미상을 차지했다.

그가 50년간 지켜온 음악 철학은 무엇일까. 브론프만은 “악보에 대한 정직한 접근, 작곡가에 대한 존중, 작품 속 의미를 깊게 파고드는 탐구력을 연주자로서의 최우선 가치로 삼아왔다”고 했다. 이어 “이젠 피아노가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배움을 멈추지 않고 음악에 담긴 진리를 최대한 솔직하게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피아니스트로서 유일한 목표”라고 덧붙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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