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고한 의약품 관세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상호관세 유예와 자동차 관세 완화 등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정책에 다시 고삐를 쥐는 모습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의약품 관세 부과 관련 발표에 한국 정부는 적극 대응에 나서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의약품 제조 촉진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의약품에 대한 관세율 및 발표 시기 등을 결정했느냐는 질문에 “향후 2주 이내(over the next two weeks)에 발표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의약품 가격과 관련해 다음 주에 큰 발표를 할 것”이라며 “전 세계 다른 나라와 비교해 우리는 매우 불공정하게 갈취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관세율 등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식품의약국(FDA)에 미국 내 제약 공장을 짓는데 걸리는 승인 시간을 단축하도록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해당 명령에는 미국 환경보호국(EPA)에도 관련 승인 절차를 가속하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밖에 해외 의약품 제조 시설에 대한 검사 수수료 인상과 외국 제약업체의 유효성분 출처 보고 시행 개선 및 미준수 시설 명단 공개 검토 등 내용도 포함됐다.
앞서 의약품 등에 대한 품목별 관세 부과 방침을 여러 차례 밝힌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의약품 수입이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할 것을 상무부에 지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위한 근거 법령으로 무역확장법 232조를 활용하고 있다.
백악관은 이날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의약품을 수입하고 싶지 않다”며 “우리 스스로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상대적인 임금 상승 등으로 인해 미국 의약품 생산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감소해 왔고, 그 자리를 중국·유럽 국가들이 확대해 왔다고 CNBC가 이날 전했다. 미국 약전위원회(USP)에 따르면 미국에서 완제의약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원료의약품(API)의 88%가 수입된다. 이 탓에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가 현실화하면 의약품 공급망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제약업계 단체인 ‘메디슨스 UK(Medicines UK)’의 마크 새뮤얼스 최고경영자(CEO)는 가디언에 “미국처럼 보험 기반 의료 시스템에서는 의약품 가격이 오르고 보험이 만료되면 사람들이 아예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할 위험이 커진다”고 말했다. 의약품업체 뉴트리밴드의 개러스 셰리던 CEO는 BBC에 “(자동차 관세와 비교해) BMW를 살 여유가 없으면 포드를 사면 되지만 의약품 비용이 인상돼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다면 대안이 없다”고 우려했다.
로슈와 노바티스, 존슨앤드존슨 등 글로벌 제약사들은 최근 미국 내 생산 시설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백악관에서 거대 제약회사 CEO들과 회동에서 해외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이전하라고 압박했다.
국내 제약·바이오업계는 실제 관세가 부과되는 품목과 방식이 공개된 뒤 구체적인 대응에 나서려는 분위기다. 특히 미국에 의약품을 수출하는 국내 위탁개발생산(CDMO) 업체들이 관세의 영향권에 들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국내 주요 CDMO 업체 가운데 미국 현지에 생산기지를 둔 곳은 롯데바이오로직스가 유일하다. 다른 기업들은 일단 현지에 충분한 재고 물량을 확보해 두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셀트리온은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부과 가능성을 언급하자 필요할 경우 현지 의약품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셀트리온 측은 “올해 미국에서 판매 예정인 회사 제품에 대해 1월 말 기준 약 9개월분의 재고 이전을 이미 완료했다”며 “관세 부과 여부 추이에 따라 필요시 현지 완제의약품 생산을 더욱 확대하는 전략으로 대응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지난해부터 검토해 온 미국 현지 원료의약품 생산 시설 확보 계획도 올 상반기 중 투자 결정을 마무리하는 등 근본적인 대응 전략 마련도 고심하고 있다.
SK바이오팜은 미국 내 6개월분의 재고 물량을 사전에 확보한 상태다. 동시에 미국 내 생산을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정부가 어떤 종류의 의약품에 관세를 부과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적극적인 대응 전략 모색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선제대응에 나섰다. 정부는 지난 4일 미국 측에 한국산 의약품 수입이 미국의 공급망 안정과 환자 접근성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의 정부의견서를 제출했다. 보건복지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의견서를 통해 한국산 의약품 수입이 미국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공급망 안정과 환자 접근성 향상에 기여하기 때문에 관세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전했다. 한미 간 의약품 무역이 경제·보건 협력의 상징이며, 한국의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이 미국 제약사의 생산 이원화를 지원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한편,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천명한 외국 영화에 대한 100%의 관세 부과 방침과 관련해 “외국 영화 관세에 대한 최종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고 5일 밝혔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상무부와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외국에서 제작돼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영화에 100% 관세를 부과하는 절차를 즉시 시작하도록 승인했다”고 적었다.
백악관의 이런 입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기존 방침에 비해서는 다소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고 USA투데이가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같은 날 “(영화) 산업 관계자들과 만날 것”이라며 신중한 기조로 돌아섰다. 영화산업 전문가들은 관세가 긍정적 효과보다 비용 상승에 따른 제작 편수 감소, 영화 티켓 가격 인상 등 부작용이 더 클 것으로 전망한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