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서울대 석좌교수·차기 한국경제학회장 인터뷰
기업들 미국 현지생산만 늘려
中 저가공세로 韓제조업 휘청
상속세 부담에 자산 해외이전
출산율 저하로 인구 감소하고
정치적 리더십 실종까지 겹쳐
재정정책 적극적으로 펼치고
금리 내려 내수 활성화나서야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가 올해 한국 경제가 처한 위기에 대해 “전방위적 공동화현상이 벌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음달 제55대 한국경제학회장 취임을 앞둔 이 교수가 지난 27일 매일경제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첫 번째로 직면한 위기는 산업공동화의 위기”라며 “미국발, 중국발 공동화에 더해 우리 스스로도 ‘제 살 깎기’식 산업공동화를 촉발하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 “높은 상속세에 따른 부(富)의 공동화와 정치 격변이 낳은 리더십의 공동화, 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 공동화까지 더해지며 한국 경제가 전례 없는 복합위기에 직면했다”고 우려했다. 그는 “1990~2000년대 미국 제조업이 중국발 산업공동화로 황폐화됐던 것같이 한국도 미국의 러스트벨트처럼 될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이근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UC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 매경이코노미스트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이 교수는 2014년 세계적 권위의 슘페터상을 받은 ‘국가 간 경제추격’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 매년 발간된 ‘한국경제 대전망’ 주집필자로 족집게 경제전망을 제시해왔다. 다음은 이 교수와의 일문일답.
―내년 한국 경제가 공동화 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내다봤다.
▶산업공동화 현상이 구조적이고 추세적인 양상을 띨 것으로 보인다.
먼저 미국발 공동화다. 한국 기업들이 바이든 행정부 때 이미 미국에 투자를 많이 했다. 그 결과 2023년 한국의 대미 투자액 215억달러는 전 세계 1위 규모로, 유럽 국가들의 대미 투자액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다.
이런 상황에서 곧 출범하는 트럼프 2기 정부는 관세를 많이 부과하는 방식으로 세계 각국의 대미 투자를 유도하려고 한다. 우리는 대미 수출 흑자 규모가 큰 터라 트럼프 정부의 관세 사정권에 들지 않으려면 미국 현지 생산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국내 생산 규모가 줄게 될 것이다.
여기에 중국발 공동화 타격까지 이어지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중국발 산업공동화는 어떤 의미인가.
▶중국이 자국 내 과잉 생산 때문에 전 세계를 상대로 저가 덤핑 물량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 주력 수출산업인 석유화학과 철강 기업들이 휘청이고 있다. 결국 이들 기업이 ‘울며 겨자 먹기’로 생산 물량을 줄이면서 공동화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이 러스트벨트가 되는 것이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한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더 큰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인가.
▶각국 정부가 다각도의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는 반면, 우린 국내 정치 상황 탓에 손발이 묶여 있다. 사실 비상계엄 전부터도 정부 대응이 부실했다. 정부가 상계관세를 부과하든, 환경규제를 걸든 해서 중국발 저가 쓰나미를 막아줘야 한다.
일례로 인도는 자국 철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산 철강에 최대 25%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반면 우리 정부는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손을 놓고 있다. 포스코가 견디다 못해 지난달 1선재공장을 폐쇄하지 않았나.
물론 중국산 저가 제품을 원하는 산업도 있다. 조선업이 대표적이다. 이런 산업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정부 역할 아닌가. 인도 정부는 저가 중국산 철강을 원하는 자국 기업들을 설득해 자국 철강을 쓰도록 하고, 자국 철강 기업에는 가격을 낮춰 이들 기업에 공급하도록 했다.
―국내 정치 상황 탓에 대외신인도 저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만난 글로벌 기업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기가 막혔다. 본사 임원들끼리 ‘한국법인 최고경영자로 오려면 감옥 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국회가 국회증언·감정법, 중대재해법처럼 기업인들을 몰아세우는 법을 잇달아 추진하면서 우리 스스로 산업공동화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업인들은 물론 해외 기업인들까지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니 해외 자본 유치가 줄어드는 구조로 가고 있다.
게다가 높은 상속세 탓에 부의 공동화까지 발생하고 있어 걱정이 크다.
―높은 상속세가 어떤 문제를 촉발하고 있나.
▶중견·중소기업인들이 상속세가 감당이 안 돼 사업을 접고 있지 않나. 또 높은 상속세를 피해 자산을 해외로 이전하는 자산가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요즘엔 증권사, 투자자문사들의 주요 먹거리가 자산 해외 이전 자문 서비스라고 한다.
한국 주식시장 저평가 문제도 상속세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다. 기업 오너들 입장에서는 내야 할 상속세가 늘어날까봐 주가 상승이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이다. 오너들 스스로가 주가가 오를까봐 걱정을 하고 있으니, 주주 친화 정책은 기업 평판 관리 차원에서 최소한의 흉내만 내고, 근본적인 밸류업은 외면하는 것이다.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이 1%대 후반으로 내려앉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 정책이 패착이었다. 새로운 세원은 발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감세만 남발했다. 여기에 경기가 좋지 않아 기업들이 이익을 많이 못 내니까 세입이 더 줄어들어 스텝이 꼬였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국가부채를 너무 많이 늘린 탓에 윤석열 정부가 재정건전화를 기치로 내걸게 된 것 아닌가.
▶물론 건전재정이 중요하다. 하지만 재정정책은 경제 상황에 맞게 가야 한다. 경제가 좋지 않은데 재정을 조인 게 윤 정부의 패착이었다. 불필요한 감세도 많았다. 종합부동산세 세율을 문 정부 이전 수준으로 내리고, 다주택자 양도소득세도 내린 게 대표적이다. 문 정부 부동산세제는 분명 문제가 많지만, 세입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굳이 손을 댈 필요는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보수 정부도 중조세·중복지로 가는 추세다.
―워낙 내수가 어려워 추경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올해 추경은 최소한 예년 수준은 기본이고, 예산 감액분만큼 더해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재정정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박 정부 때는 복지지출이 늘었지만, 국가부채는 늘지 않았다. 늘어나는 지출에 맞게 신규 세원을 개발하고, 세액공제를 줄여 재정의 균형을 잘 잡은 덕분이다. 윤 정부는 감세를 남발하면서 재정균형을 잡지 못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말 두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내렸고, 올해도 금리 인하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천명했다.
▶인하 기조를 천명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고금리 기조가 오래 지속돼 소상공인들과 서민들의 대출이자 부담이 굉장히 크다. 이 같은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내수 활성화 차원에서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