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냉전 이후 대거 폐쇄했던 지하 벙커를 복원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러시아의 공습 가능성에 대비하겠다는 취지다.
20일(현지시간)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자극받은 독일은 오는 2029년까지 국방 예산을 약 2배로 증액, 전쟁에 대비하는 국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향후 수년 내 러시아가 서유럽을 공격할 역량을 갖출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처럼 도시가 매일 폭격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민간인 수백만명이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독일 당국이 벙커 부활을 비롯한 대책 마련에 나서는 건 이같은 우려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유사시에 대비해 탱크나 무인기(드론)와 같은 무기만 확보하는 게 아니라 민간인 보호 대책도 확실하게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WSJ에 따르면 독일 당국은 저렴한 비용으로 빠르게 대피소로 개조할 수 있는 공공 공간 목록을 작성 중이다. 장기적으로는 더욱 튼튼한 보호 시설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
또 시범 사업으로 우선 2026년 말까지 100만명이 대피할 수 있는 벙커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후 대피소를 전국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도시 곳곳에 남은 회색빛 고층 방공호는 아직 건재하며, 일부는 미술관, 호텔, 고급 주택 등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대형 벙커 대부분은 복원에 상당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대규모 인파가 밀집할 경우 오히려 공격 목표가 될 가능성도 있다.
독일 당국은 이같은 점을 고려, 지하 주차장과 지하철역, 건물 지하 등 기존 구조물의 내구성을 강화해 대피소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개인 지하실을 벙커로 개조하려는 독일 국민도 많아지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냉전 시기 운영되던 2000여개의 벙커와 대피소 중 현재 남은 시설은 58개뿐이다. 이론상 이들 시설이 수용하는 인원은 독일 인구의 0.5%인 48만명에 그친다.
독일 정부 대변인은 WSJ에 “베를린에 있는 4개의 벙커를 포함해 남아 있는 대피소들은 기능을 상실했으며, 운영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말했다.
WSJ는 “불과 20년 전에도 독일은 자국 영토에 군사적 공격이 가해질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판단, 마지막 남은 공습 대비 벙커들을 폐쇄했다”며 “그러나 오늘날 이 결정을 되돌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