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놀이’, ‘전당포식 영업’. 금융권, 특히 은행을 향한 이재명 대통령의 연이은 일갈이다. 금융회사가 손쉬운 예대마진(대출과 예금 금리 차이)에만 기대지 말고, 보다 생산적인 곳에 돈을 투입해 사회적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취지다. 서울 아파트 콘크리트 덩어리에 묶인 돈을 기업과 자본시장에 흘러가도록 유도하겠다는 나름의 선의(善意)도 녹아 있다.
한편으론 은행에 대한 선입견도 깔려 있다. 금융사가 인가받은 통화 유통 권한에 기대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의 이자 장사로 떼돈을 벌고 있다는 인식이 굳게 박힌 듯하다. 금융을, 정부가 필요할 때 자금을 조달하는 수단으로 보는 것 같다.
정부의 '돈줄'이 된 은행들
대통령의 인식은 전광석화처럼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전략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조성하는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가 대표적 사례다. 정부는 펀드 재원의 절반(75조원)을 민간에서 조달한다고 발표했는데, 정작 돈을 댈 민간 금융회사와 연기금 등은 어리둥절했다. 사전 협의조차 없어서다. 난데없는 교육세율 인상(0.5%에서 1%로)과 보이스피싱 피해액 배상, 배드뱅크 출자 등엔 할 말을 잃고 대꾸도 못 하는 처지다.
매도 맞아야 한다. 은행들은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담보인정비율(LTV) 및 국고채 전문 딜러 담합에 관한 정부 제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수조원의 과징금 폭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마다 밸류업(기업가치 제고)은커녕 기존 주주환원 약속도 못 지킬 판이다.
급기야 대통령의 선의는 선을 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9일 국무회의에서 “고신용자의 이자 부담을 늘려 저신용자의 대출 금리를 낮추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뒤흔드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개인과 기업의 신용위험에 따라 금리를 다르게 적용하는 ‘위험 기반 가격 책정’은 금융거래의 기본이다. 고신용자의 금리를 인위적으로 높여 저신용자의 금리를 낮추는 방식은 시장을 뒤틀 뿐이다. 무엇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고신용자를 역차별하고 저신용자에게는 ‘정부가 이자를 보전해준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도덕적 해이의 조장이다.
경제 방파제 부서질 수도
이쯤 되면 한국의 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들은 ‘정서적 국유화’ 단계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 금융권에선 차라리 금융사를 대상으로 한 횡재세를 도입해 예측 가능성이라도 확보하는 게 낫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이럴 거면 정부가 지분을 사들인 후 은행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게 더 화끈하지 않겠냐는 냉소(冷笑)마저 나온다.
정책은 선의에만 기대면 안 된다. 정책이 가져올 파급 효과와 그에 따른 부작용을 더 무겁게 여길 필요가 있다. 금융회사가 정부와 정치권의 ‘돈줄’로 전락하면 금융 생태계의 본질적 경쟁력이 무너진다. 정부가 그토록 원하는 생산적 금융은커녕 시장의 효율성과 위험 관리 능력까지 흔들리게 된다. 은행이, 금융회사가 거덜 나면 위기 때 사회적 손실을 흡수하는 ‘방파제’이자 ‘최후의 안전판’도 부서진다. 적어도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