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 오페라)가 사우디아라비아와 1억 달러(약 1389억 원) 규모의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발생한 최악의 재정 위기에서 돌파구를 찾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메트 오페라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1억 2000만 달러(약 1667억 원)를 기금(Endowment)에서 인출해 운영비로 썼다. 최근에는 억만장자를 사칭한 젊은 후원자 피에트라스의 기부 사기 사건으로 긴급히 500만 달러(약 69억원)를 인출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올해 두 차례에 걸쳐 메트 오페라의 신용등급을 '부정적(negative)'으로 평가한 바 있다.
사우디와 손잡은 피터 갤브
지난 3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2006년부터 메트 오페라를 이끌어온 피터 갤브(1953~)총감독은 이러한 위기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사우디와 대규모 업무 협약을 성사시켰다. 이번 협약에 따라 메트 오페라는 2028년 사우디에 완공 예정인 ‘로열 디리야 오페라하우스(Royal Diriyah Opera House)’의 겨울 시즌 전속 단체로 활동한다. 매년 2월, 약 3주 동안 뉴욕에서 이미 무대에 올렸던 전막 오페라와 콘서트를 사우디 무대에 올리게 된다.
피터 갤브는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이번 협약이 2032년까지 메트 오페라를 재정적·예술적으로 강하게 만들 것”이라며 “더 이상 긴급 자금을 위해 기금을 인출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갤브는 ‘전설적 언론인’으로 평가받는 뉴욕타임스 전 편집국장 아서 갤브(1924~2014)의 아들이다. 그는 "협약 규모는 최소 1억 달러 이상이며, 8년에 걸쳐 2억 달러(약 2779억 원)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전했다.
2023년부터 건설 중인 로열 디리야 오페라하우스는 2028년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페라하우스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전신 국가인 디리야 토후국(1774~1818)의 역사적 지역에 위치한다. 극장 내부에는 약 2000석 규모의 오페라극장을 비롯해 450석 규모의 가변형 극장과 다목적홀, 소극장과 리허설룸 등이 마련돼 총 35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다.
건축, 실내 건축, 조경 설계는 노르웨이 오슬로에 본사를 둔 스노헤타(Snøhetta)가 맡았다. 올해 완공된 상하이 그랜드 오페라하우스와 2027년 개관 예정인 부산 오페라하우스도 스노헤타의 작품이다.
인재 교류와 신작 위촉…노조 "환영한다"
이번 협약에는 공연 외에도 다양한 교류 프로그램이 포함됐다. 2026년부터 메트 오페라의 린데만 영아티스트 프로그램 단원들이 사우디 오페라 무대에 오르고, 사우디 성악가·연출가·무대기술자들은 뉴욕으로 건너와 메트에서 훈련을 받게 된다. 또한 영국 작곡가 조너선 도브는 사우디를 배경으로 한 신작 오페라를 위촉받았다. 사우디 측은 “메트와의 파트너십이 사우디가 클래식 음악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노력을 크게 앞당길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번 발표는 메트 내부에서도 환영받았다. 합창단, 솔리스트, 무용수, 무대감독 등을 대표하는 노조인 ‘미국음악예술가협회(American Guild of Musical Artists)’는 성명을 통해 “예술과 예술가가 다음 세대에도 번성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재정적 안정의 발걸음”이라며 갤브가 발표한 사우디와의 업무 협약에 대한 지지를 표했다. 이사회 역시 갤브 총감독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임기를 2030년까지 연장했다. 갤브가 과거 스페인 엘 파이스(El País)와의 인터뷰에서 2027년까지 메트 오페라의 수장으로 재직할 것을 희망한다고 밝힌 것보다 3년이나 길다. 극단적 위기 속에서 재정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협상을 끌어낸 그의 결단이 메트 오페라 구성원들로부터 전폭적 신뢰를 얻은 것이다.
정치적 노선보다 생존을 최우선으로
갤브는 총감독으로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바 있다. 그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과의 관계를 끊었고, 블라디미르 푸틴을 지지했던 스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를 메트 오페라 무대에 출연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갤브는 사우디와의 문화 교류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미국 정보당국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승인 아래 벌어진 일이라고 밝힌 2018년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을 ‘끔찍한 사건’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카슈끄지는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이자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으로, 튀르키예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을 방문했다가 피살돼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 그런데도 갤브는 사우디가 여성들에게 사회적 자유를 부여하는 변화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사우디가 자국민과 국제 사회의 눈에 더 나은 모습으로 비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나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라는 기관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한다. 모든 사안을 개인적 감정으로 운영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