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남자 주인공 양관식(배우 박보검/박해준)에 열광하는 이른바 '관식이병' 현상이 국내를 넘어 해외로까지 퍼지고 있다. 단순한 팬심을 넘어, '양관식 같은 사람과의 사랑'을 현실에 대입하며 감정이입을 하는 모양새다.
국내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커뮤니티에는 '관식이병', 'My Own Gwansik'이 쓰인 게시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극 중 양관식은 1950년대 제주에서 태어난 어부의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오애순을 향한 일편단심 사랑을 이어가는 인물이다.
무뚝뚝하지만 묵묵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애순에게만은 사랑을 끊임없이 표현하는 등 평생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모습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현실엔 없는 유니콘(판타지적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나만의 관식이"…해외 팬도 감정이입
국내에서 시작된 이른바 '관식이병'은 '폭싹 속았수다' 공개 직후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 비영어권 시리즈 톱10에 오르며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다.
해외 팬들은 자신만의 '양관식'을 찾아 나섰다. SNS에는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요리를 해주거나 선물을 준비해주는 장면, 무심한 듯 챙겨주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공유되고 있다. "He is my own Gwansik(그는 나만의 관식이)"라는 문구와 함께다.
영상에는 5년 사귄 남자친구가 신발 끈을 묶어주거나, 생선을 발라주고, 과일을 깎아주는 모습, 남편이 문을 열어주는 장면 등이 담겨 있었다. 일부 영상은 '좋아요' 29만 개를 넘길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한 외국인은 본인의 SNS에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의 관식이"라며 부모의 다정한 일상을 담은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해외 누리꾼들은 관식이 캐릭터를 '그린 플래그(Green Flag)'라 부르며 유니콘처럼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린 플래그'를 넘어 그린 포레스트(Green Forest)', '아마존 수준이다' 등의 반응도 등장하며 글로벌 밈으로 소비되고 있다.
"관식이 같은 남자, 현실에 있을까"…판타지형 남편상 열풍
이 같은 '관식이병'은 연애 중인 국내 이삼십대 여성, 그중에서도 특히 기혼 여성들을 중심으로 퍼졌다. "남편이 평소 해주던 행동이 갑자기 관식이처럼 느껴진다", "관식이 보다가 눈물 났다. 남편한테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댓글들이 대표적이다.
반대로 연인이나 남편이 없는 이들은 "관식이 같은 사람 없으면 결혼 못 하겠다", "눈높이만 더 올라갔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편 양관식과 정반대 성향으로 가부장적인 남성 캐릭터의 최고봉인 학씨 아저씨(배우 최대훈)에 대한 언급도 나오고 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는 "친구가 자꾸 자기 남친을 관식이라고 해서 듣기 힘들다"는 글을 올렸고, 또 다른 누리꾼은 "우리 아빠가 자기가 양관식인 줄 안다. 당신은 학씨 아저씨입니다"라고 적어 화제를 모았다.
드라마나 영화의 특정 캐릭터에 감정적으로 빠지는 이른바 '○○이병' 현상은 처음이 아니다. 디즈니 '주토피아'의 닉&주디 커플은 '친구 같은 연인'으로 회자됐고, '엘리멘탈'의 남자주인공 웨이드는 '눈물을 숨기지 않는 따뜻한 남자', 앰버는 '불처럼 화끈하고 리더십 강한 여성'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들 캐릭터는 모두 현실에서 충족되기 어려운 감정적 안정, 헌신, 공감 등을 대표하며 시대가 원하는 '감정형 이상형'으로 자리 잡았다.
"현실의 인물은 완벽하지 않다는 인식"…'관식이병'유발
전문가들은 '관식이병' 현상이 정서적 결핍의 투사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감정 표현이 서툴고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어려운 현대 사회에서 양관식은 '이상적 사랑'의 총합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현실의 인물은 완벽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이상적인 남편이나 연인을 상상할 때 여러 사람의 장점을 합쳐놓은 존재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많은 불만이 생기기 때문에, 관식이와 유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며 정서적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드라마나 영화 속 인물을 현실과 겹쳐 보며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고, 그로써 욕구를 채워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곽 교수는 "특히 여성 중심으로 '관식이병'이 퍼지는 이유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관계 중심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며 "사회적으로도 여성은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내면에서 상상하고 꿈꾸며 채워가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이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크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관식이라는 캐릭터는 한국 드라마 속 남성 캐릭터 가운데 새로운 유형"이라며 "기존 드라마 속 남성들은 주로 사회적 성공, 부, 외모 등으로 이상화되었지만, 관식은 무언가를 소유하기보다 지키고 헌신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자기주장보다 가족의 바람을 우선하며 묵묵히 돕는 모습이 호감과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이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와 비교하며 정서적 충족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