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달리 습기를 한껏 머금은 폭설이 게릴라처럼 내렸다. 무거운 눈이 두껍게 쌓이면서 시설물, 인명 피해가 잇따랐다. 강원 영동과 동해안에는 재난 특보가 발령되고 주요 국립공원 등산로도 등반이 금지됐다. 올해 이례적인 눈 폭탄은 서울, 수도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짧은 시간 최고 10cm 이상 상당한 눈이 집중적으로 내린 곳들에선 지붕이 무너지고 지하 주차장 입구가 붕괴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 누구나 기다리던 낭만의 대상이 어쩌다 눈 폭탄과 골칫거리로 전락했나?
습설의 원인은 ‘해수온 상승’과 ‘절리저기압’이 꼽힌다. 절리저기압은 특이한 형태의 저기압으로 몽골 북쪽의 차가운 공기를 한반도 쪽으로 빠르게 가져오는 역할을 하며 대기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절리저기압이 따뜻한 서해와 만나면서 한반도에 무게가 무겁고 기습적인 폭설을 가져온 것이다. 결국 습설 역시 인간의 생산, 경제활동이 초래한 ‘온실가스’ 때문에 빚어진 자연현상의 하나로, 지구의 몸서리침이자 외침이다. 문제는 내년, 후년의 습설은 더 잦아지고, 더 무거워지고, 더 강한 위력을 보여줄 거라는 점이다.
올해의 봄이 경칩(驚蟄)을 넘어 춘분(春分)을 향해 가고 있다. 예년 경칩 즈음이면 폈을 남쪽 매화(梅花)가 아직이라 아우성이다. 절기가 도래했는데도 꽃을 피우지 않는 꽃나무도 문제지만, 올해는 숲 도처에 가지 꺾이고 부러진 나무들이 너무 많다. 겨우내 나무를 보호했던 두터운 낙엽 이불이 숨이 죽다 보니, 도길에 떨어져 나뒹구는 부러진 가지, 바닥을 향해 부러진 가지를 축 늘어트린 위태로운 나무들, 아예 뿌리 뽑혀 쓰러진 나무들이 더 명징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육신의 한 사람 성삼문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며 칭송했던 소나무도 푸른 빛을 지키지 못하고 부러졌다.
겨울철 나무들이 폭설에 많이 꺾이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름드리나무들은 모진 비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거듭 내려앉은 눈송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정정한 거목이 꺾이고 부러진다. 여즉 물기 머금은 오렌지빛 생살과 단면을 내보이며 부러진 나무들이 애잔하고 처량하게 느끼는 이가 어디 나뿐일까. 상흔 보일 때마다 나무가 주재료이고 친구인 목공예가들의 동병상련과 애달픈 마음이 여느 공예가들보다 크겠구나 생각한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뒷산에만 올라도 울창한 숲을 만나 맑은 공기, 음이온을 흡입할 수 있다. 각양각색의 나뭇잎을 만나고 새소리를 들으며 숲속에서 고요히 즐기는 명상과 휴식은 색다른 경험이고, 정서적 안정과 만족감을 준다. 숲속 생태계의 다양한 동식물에게도 나무는 조건 없이 집과 먹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모태와 같다. 산길 아래로 폭설이나 소나무재선충병, 솎아베기 등의 이유로 벌채 후 적층해 둔 더미가 곳곳 눈에 띈다. 산림청에서는 부산물을 원료나 바이오에너지원으로 재활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경제 타당성 부족으로 활용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결국 잘린 나무들은 산허리, 외진 곳 어디쯤 방치되기 일쑤다.
목공예가이자 조각가인 초남이 홍진(본명 이홍진)의 재료는 ‘산에서 내려온 나무들’이다. 산에 덩그러니 잘려 버려진 나무들, 생명을 다해 방치된 불필요한 덩어리에 솜씨와 창의를 더해 새로운 생명과 유용을 부여한다. 작가는 부모 상실의 트라우마와 정서적 유기 불안의 기억이라는 개인사를 가지고 있다. 동병상련의 마음을 산림 벌목된 존재들에게 대입한다.
작가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국면으로의 끊임없는 생성(易)이다. 그에게 나무는 식물로서 태어남과 자람, 종의 번식은 끝났어도 그것이 개체의 죽음은 아니다. 생명현상은 일회성을 끝났지만, 공예가가 재료로 선택해 인간에 무해한 가공법과 채색으로 가공하여 누군가의 필요나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다른 종으로의 거듭난 것이요, 벌목으로 인한 생물의 죽음은 하나의 순환과정과 다름없다.
누군가에는 버려진, 소외된, 불필요한 것이지만, 남들과 다르게 혹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작가들과 만나면 유용한 예술과 공예의 재료로 거듭난다. 초남이 홍진은 목공선반으로 원, 삼각형, 네모 등 기본 도형을 깎은 후 조립해 새로운 나무를 만든다. <정원수 프로젝트>다. 이 작업을 누군가는 ‘버려진’과 ‘재생’에 주목해 리사이클링 미술로 이해하겠지만, 작가에게 기본 도형은 자연의 본질과 영원불변함을 의미하며, 도형을 재구성해 강약의 리듬을 만들어 새로운 의미와 감정을 생성하는 조형 행위다.
그가 나무를 깎고 채색하는 공예 행위는 단순히 쓸모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방치되었던 죽음에 새로운 가치와 생명성을 부여하는 생성과 부활이고, 나아가 자기 치유를 의미한다. 또한, 공예품을 선택하고 사용할 타인과 공유하고 연결됨을 확인하는 우주아(宇宙我)의 실천이다.
이수빈의 《떠내려온 조각》 역시 방치된 유목, 수령이 오래되어 베어낸 과실나무 등을 구해 조각도로 일일이 깎아 만든다. 폐목, 산림부산물이 되기까지 저마다 역사, 얽힌 사연 하나 없는 나무가 어디 있을까? 숲, 마을, 길가 그리고 누군가의 집 마당 한편에서 싱싱하고 무성한 꽃과 잎을 피우며 수십, 수백 번의 사계절을 돌아 살며, 무수한 인간, 동식물의 생과 소멸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억겁의 시간을 나무는 나이테, 껍질, 굽은 몸 안에 고스란히 기억한다.
등산로 아래, 바닷가 후미진 곳에서 방치, 혹은 부유했을 나무들을 보면 당최 생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버려진 나무에서 생명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손길을 더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목재에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강요, 주지시키지 않고, 나무의 생김새나 결 방향에 따라 최대한 고유성을 존중하여 형상을 조각하며 주로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조각한다.
작가가 용도를 부여해 나무를 깎으면 폐목은 차 도구, 서가 용품, 옷걸이 등 일상용품으로서 새로운 생을 갖는다. 조각, 공예품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오래된 나무에 깃든 생명성과 개성을 이야기로 풀고 자신의 감성과 서사를 담는 같은 일이다. (전업 목수가 되기 전, 작가와 기자로 활동했던 그의 관심과 이력이 여전히 방법과 행위는 달라도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무를 ‘유용한 재료’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또한 생의 가득 찬 존재로서 시간을 점유한 채 그 속에서 행위하고 정지하지 않고 살았던 생물이었다. 나무의 모든 것은 나무가 지구상의 한 존재로서 겪고 목도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유전자 형질 깊은 곳에는 감히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운 태곳적 시간이 흐르고 있다.
헤르만 헤세가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에서 ‘아름드리나무들은 우리보다 오랜 삶을 지니고, 우리가 나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우리보다 지혜롭다.’라고 말한 이유다. 방치된, 잘린 폐목재, 부산물, 낙엽이 생명 다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생과 영속의 메시지가 있다. 폐목재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순환하는 것이다.
공예가는 폐목재에서 삶의 아름다움과 영속성을 발견하고, 우리는 그의 눈과 손길, 따뜻한 마음 덕분에 작품에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폐목재, 유목으로 만든 공예품에서 인간의 유한함과 생의 연속성을 반추한다. 조각처럼 눈으로 즐기고 일상의 편리함과 안식, 즐거움도 느낄 수 있으니, 생을 다해서도 다른 생을 거듭하여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아낌없는 유익이 끝이 없고 아름답다.
홍지수 공예 평론가•미술학 박사•CraftMIX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