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군사기밀 유출 논란을 빚고 있는 ‘시그널 게이트’는 외교안보 관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적지 않다. 미국 외교안보 분야의 파워엘리트들이 총망라된 메신저 단체 대화방의 대화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어떻게 결정되고 있는지 그 생생한 속살을 엿볼 수 있어서다. 특히, 최근 미-우크라이나 정상회담 등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대장을 자임한 J D 밴스 부통령의 속내와 ‘문고리 권력’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의 위상 등이 생생히 담겼다. 시그널 게이트를 세상에 알린 제프리 골드버그 디애틀랜틱 편집장이 공개한 대화방 전문을 분석했다.
●트럼프 지시에 토를 단 행동대장 부통령
‘후티 PC(Principals Committee) 소그룹’이라는 제목 답게 예멘의 친이란 무장단체 후티 반군에 대한 공습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대화방에 파문을 일으킨 건 밴스였다. 대화방이 개설된 바로 다음 날인 3월 14일 오전 8시 16분 그는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포문을 열었다. 후티 반군의 공격 대상인 홍해(수에즈 운하) 통과 선박들의 단 3%만 대미(對美) 무역과 관련돼 있고, 40%는 유럽 무역에 기여한다는 것. 더구나 “후티 공습은 심각한 수준의 유가 급등을 초래할 수 있다”며 “공습을 한 달 정도 연기하고 경제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는 게 합리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후티 공습은 유가 급등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유럽) 좋은 일을 하는 것이기에 재고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통령의 앞선 후티 공습 지시에 사실상 어깃장을 놓은 것.
더구나 밴스는 “대통령이 이것(후티 공습)이 현재 유럽에 대한 그의 메시지와 얼마나 불일치하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 등 동맹 외교에서 철저한 거래 관계를 추구하고 있는데, 대통령의 공습 지시가 이 같은 외교 방침과 어긋난다고 지적한 것. 차기 대권주자를 꿈꾸는 밴스가 트럼프 대통령보다 강력한 ‘고립주의 외교’ 원칙에 따라 대통령의 지시에 사실상 반기를 든 셈이다. 26일 워싱턴포스트(WP)는 시그널 대화방에서 밴스의 메시지는 미국의 대외 개입 최소화를 요구하는 유권자들의 요구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그에게 정치적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다.●논란 종결한 실세 스티븐 밀러
밴스의 문제 제기에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과 마이클 왈츠 국가안보보좌관은 ‘항행의 자유’와 ‘대외 메시지’를 들어 공습 필요성을 설득하고 나섰다. 헤그세스는 “후티 공습을 지연시키면 미국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고, 이스라엘이 먼저 행동에 나설 경우 미국이 주도적으로 나설 기회를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국제통상 질서의 전제가 되는 항행의 자유를 회복하는 건 미국의 핵심 국가이익임을 강조했다. 왈츠도 “결국 홍해 항로를 다시 여는 건 미국의 몫이 될 것이다.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 국무부와 협력해 공습 비용을 유럽으로부터 받아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헤그세스를 거들었다.
후티 공습을 둘러싼 부통령과 외교안보 참모들의 논란은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던 한 사람의 말을 끝으로 종결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복심이라고 불리는 밀러다. 그는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대통령은 분명히 후티 공습을 ‘승인’했다. 만약 미국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항행의 자유’를 회복한다면 이에 상응하는 경제적 이익을 (유럽 등으로부터)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썼다. 이후 헤그세스의 “동의한다”는 답글 외에 누구도 추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고, 다음 날 후티 공습은 현실화됐다. 철저히 거래 중심의 외교 관점에서 동맹을 불신하는 트럼프 행정부 핵심 인사들의 이런 속내는 남의 일이 아니다. 외교가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핵보유 발언과 맞물려 북핵 ‘스몰딜’ 과정에서 한국이 패싱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곧 본격화될 미국과의 통상 및 방위비 협상을 앞둔 당국자들이 시그널 게이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미 외교안보 라인의 인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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