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운명[이은화의 미술시간]〈445〉

5 days ago 13

한 폭의 그림에 세상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화려한 색채만큼이나 등장인물도 많고 복잡하다. 누군가는 사랑하고, 누군가는 싸우며, 누군가는 죽음을 향해 간다. 오른쪽의 연인들은 서로에게 푹 빠져 뒤로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평화와 갈등, 사랑과 죽음, 젊음과 늙음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가 1907년 그린 ‘다채로운 삶’(사진)이다. 완전 추상에 도달하기 전, 그는 러시아 민담과 전통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인생의 희로애락을 화려한 색채로 풀어냈다. 관객이 그림 속을 산책하듯 감상하기를 바랐던 화가의 의도처럼, 화면 곳곳에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진다. 흥미로운 점은 그림이 실제로 겪은 운명도 파란만장했다는 사실이다. 1927년 네덜란드의 유대인 수집가 에마누엘 레벤슈타인 부부가 구입한 작품은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보관돼 있었다. 1940년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이후 소유자 동의 없이 경매에 나왔다. 누가 지시하고 대금을 가져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그림은 네덜란드 수집가를 거쳐 독일 바이에른 주립은행으로 넘어가 뮌헨 렌바흐하우스 미술관에 50년 가까이 전시됐다. 그사이 원소유주의 후손들은 그림을 되찾기 위해 오랜 싸움을 이어갔다. 마침내 2023년, 83년 만에 작품은 후손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달 14일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 그림은 3156만 파운드(약 560억 원)에 낙찰됐다. 86년 전 강제로 경매에 나왔던 그림이 이번에는 후손들의 뜻에 따라 새 주인을 찾았다. 새 소유주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림이 개인 수장고에 보관될지, 미술관에 걸릴지도 알 수 없다. 칸딘스키가 그린 것은 인간의 다채로운 삶이었다. 그러나 그림도 인간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을 겪었고, 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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