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을 입은 청년은 언덕을 오르다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전쟁터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습니다. 청년은 친구들과 즐겁게 헤엄치던 그 여름날을 문득 떠올렸습니다.
갑자기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앞서가던 병사가 힘없이 쓰러졌습니다. “매복이다!” 누군가 외쳤습니다. 그리고 빗발치는 총알. “사격 개시!” 지휘관의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청년을 비롯한 병사들은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청년은 봤습니다. 우연히 전투에 휘말려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는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 청년의 가슴은 끓어올랐습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뛰어나가 필사적으로 외쳤습니다. “저쪽은 쏘지 마! 여자와 아이들이 있다!”
바로 그때, 두 발의 총탄이 청년의 팔과 가슴을 꿰뚫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쓰러져 땅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렇게 청년은 전쟁터에서 29년의 짧은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레데릭 바지유(1841~1870). 인상주의의 선구자이자, 너무 일찍 떠난 비운의 천재 화가였습니다. 모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고, 르누아르가 ‘순수하고 다정했던 친구’라며 평생을 두고 그리워한 사람. 바지유가 살았던 청춘의 흔적을 지금부터 풀어 봅니다.
금수저 의대생의 방황
1862년 프랑스 파리의 한 미술 교실.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들어오자, 그림을 그리던 학생들의 손이 멈췄습니다. 큰 키에 깨끗한 옷차림, 우아하고 품위 있는 몸가짐, 그리고 어색한 미소. 자신을 프레데릭 바지유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누가 봐도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취미로 그림을 배우러 온 도련님이군.’ 그 학생들 중 하나였던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바지유를 처음 보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저 녀석 집에는 하인이 정말 많을 것 같다’고.”
바지유는 금수저였습니다. 1841년 프랑스 남부 도시 몽펠리에의 유서 깊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무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그런 바지유의 장래 희망은 화가. 아버지 친구 집에서 본 멋진 명화들이 그에게 심어준 꿈이었습니다. “취미가 있다는 건 좋은 거야.” 아버지는 바지유에게 미술 강의를 듣게 해 줬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화가가 되는 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미술은 취미로만 해. 잘 살고 싶으면 전문직을 해야 한다. 의사가 되렴.” 어린 바지유는 아버지의 말을 감히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스물한 살이 되던 1862년, 바지유는 몽펠리에를 떠나 파리로 향했습니다. 파리 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취미라도 좋아.’ 바지유는 스위스 화가 샤를 글레르가 운영하는 미술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리를 만났습니다. 훗날 인상주의의 핵심이 되는 화가들이었지요.
바지유와 친구들은 금세 친해졌습니다. 바지유가 밥과 술을 잘 사준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미술을 잘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일 거라는 편견과 달리, 바지유의 실력과 그림 보는 눈은 탁월했습니다. 생각도 서로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고리타분한 ‘꼰대’들이 그리는 역사와 종교 그림을 지겹다고 생각했고,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했고, 교실 밖에서 햇빛을 받으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친구들과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진 바지유에게 의학 공부는 뒷전이 됐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오늘은 뭘 그릴까’만 생각했고, 수업을 빼먹고 친구들과 숲으로 그림을 그리러 쏘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 생활이 2년이나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의대 공부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스물세 살이던 1864년, 바지유는 시험에 낙제한 뒤 의대를 그만두게 됩니다. 아버지는 바지유에게 크게 실망해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응원해주기로 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바지유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아는 미술은 지금과 꽤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모네가 붓을 꺾거나,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직 인상주의라는 말도 없었던 시기, 바지유와 모네를 비롯한 젊은 화가들은 ‘왕따’였습니다. 붓질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그림을 선호하던 당시 미술계 사람들은 거칠고 낯선 그들의 그림을 ‘어설프고 품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작품을 사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화가들은 항상 배고팠습니다. 바지유는 아버지에게 받은 용돈으로 친구들을 먹여 살리다시피 했습니다. 그 중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게 모네였습니다.
바지유는 모네의 천재적인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봤습니다. 그는 모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됐습니다. 모네가 그린 ‘정원의 여인들’을 2500프랑, 지금 우리 돈으로 치면 수천만 원에 달하는 거액에 사준 게 단적인 예입니다. 아무리 바지유가 부자라도 그만한 돈을 한 번에 줄 여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지유는 매달 50프랑씩 할부로 작품값을 지불했습니다. 사실상 용돈을 준 겁니다. 모네의 아내가 되는 카미유를 소개해준 것도 바지유. 의학 지식을 활용해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친 모네를 치료해 준 것도 바지유였습니다. 모네는 바지유를 아들의 대부로 삼아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바지유가 거저 주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그는 친구들의 그림을 보고 그 장점을 빠르게 흡수했습니다. 모네에게서는 색채와 빛 표현을, 시슬리에게서는 부드러움과 공기 표현을, 르누아르에게서는 배경의 패턴과 따뜻하고 부드러운 붓질을, 에두아르 마네에게서는 특유의 인물 표현과 색의 대비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창조해 나갔습니다. 바지유의 작품 속에서는 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인물의 단단한 존재감이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풍경화와 인물화를 결합한 겁니다. 사물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빛의 변화에 집중한 모네와 르누아르는 이루지 못한 성과였습니다. 덕분에 그는 1868년 당시 최고 권위 전시회였던 살롱에도 작품을 걸게 됐습니다. 인상주의 그룹에 속한 화가 중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훗날 인상주의의 큰형님으로 불리는 카미유 피사로는 바지유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 그룹에서 가장 재능 있는 화가 중 하나다.”
서로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었던 인상주의 화가들이 한데 모여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바지유 덕분이었습니다. 살롱에 입선한 그해, 바지유는 르누아르와 함께 큰 작업실을 빌려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업실은 마네와 모네를 비롯해 많은 재능있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그리고, 서로 토론하고 논쟁하며 실력을 키워가는 장소가 돼줬습니다.
사랑, 비밀, 혼란
평론가들은 바지유의 그림을 칭찬했습니다. “매년 봄 바지유는 여름을 그린 그림들을 들고 온다. 그 작품들은 푸른 하늘과 햇살, 그리고 소박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에드몽 뒤랑티). “놀라울 정도로 충만한 빛, 햇빛의 힘, 야외의 독특한 인상을 포착했다”(자샤리 아스트뤽). 친구들은 바지유를 부러워했습니다. 자신들의 그림과 달리 바지유의 작품은 미술계에서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데다, 돈 걱정 없이 미술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바지유 자신은 마음 한편에 늘 불안과 고민을 품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평론가 피터 슈엘달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강렬한 빛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의심이 드리운 그림자와 우울함이 불러일으킨 무기력함도 스며들어 있다.” 바지유는 항상 모네와 르누아르 같은 친구들에 비해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덕분에 집안의 지원을 받는다는 점도 그에게는 오히려 컴플렉스였습니다. 붓 한 자루로 운명을 헤쳐 나가며 진검승부를 벌이는 친구들과 달리, 자신에게는 절박함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사이도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몽펠리에로 돌아와서 그림을 그리거라.” 바지유는 아버지의 편지에 이렇게 답장했습니다. “지방 사람들 몇 명이 제 그림을 좋아해봤자 무슨 소용인가요.”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친구들과 경쟁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분노에 바지유는 납작 엎드렸습니다.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아버지께 부담이 된다는 사실이 늘 마음 아픕니다. 돈은 아껴 써 보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사랑도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애인은 없냐”고 친구들이 물으면 바지유는 늘 힘없이 웃으며 답했습니다. “어릴 때 제대로 차인 적이 있어서 말이야. 나는 연애 운이 없나 봐. 그림에 집중해야지 뭐.” 어머니의 강권으로 선을 본 적도 있었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몇 살만 더 어리고, 머리카락이 좀만 더 남아있었더라면 말이야….” 바지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바지유가 혼자였던 이유는 따로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적잖은 미술사학자들은 그가 남성에게 사랑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가 사랑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혼란스럽고 외로웠다는 것뿐입니다.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않고 속으로 삭이는 성격.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스스로 밥벌이를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 가난한 친구들과의 묘한 거리감. 때때로 친구들이 자신을 ‘지갑’으로 여긴다는 느낌. 지방 출신에 당시 프랑스에서는 소수파였던 개신교 신자라는 점. 여기에 잘 풀리지 않는 연애까지.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편두통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어. 정말이지 지치고 힘들어.”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모병 광고가 들어왔습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으니 최전선에서 싸울 병사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바지유는 망설이지 않고 입대 신청서를 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을 증명해서, 진정한 남자로 새로 태어나 돌아오고 싶어서였습니다. 1870년 8월,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습니다.
평소 온화하고 내향적인 성격이었던 바지유가 목숨을 걸고 최전선에 자원입대했다는 소식에 친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지유의 예술은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상황. 게다가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 얼마든지 후방에 배치되거나 돈을 내고 합법적으로 군 면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담아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은 의무가 없는데 왜! 정말 얼간이로군! 맙소사! 맙소사!”(르누아르)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방금 자네가 입대했다는 편지를 받았소. 정말 미쳤군…! 왜 친구들과 상의하지 않았소? 신의 가호가 있기를.”(에드몽 메트르)
그래도 바지유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답답하고 꼬인 상황이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바지유는 훈련소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짐승 같은 생활에 지치긴 합니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을 겁니다.” 새로운 경험은 확실히 그의 마음속에 뭔가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 자신이 펼쳐나갈 예술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을 겁니다. 동료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바지유는 1870년 11월 27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거든.”
다음날인 11월 28일. 바지유의 부대는 파리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진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지유는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아홉 살. 단 7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킨 천재의, 너무나도 허무하고 슬픈 최후였습니다. 르누아르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바지유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온화하고 고귀한 존재였다. 그렇게 죽다니….”
청춘을 남기다
인상파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 첫 인상주의 전시는 4년 뒤인 1874년 열렸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바지유는 전시 참여 작가 목록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인상주의는 미술사의 전설이 됐고, 전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사조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바지유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100여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바지유라는 이름에 다시 주목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인상주의가 단 한 번의 전시로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아직 인상파라는 이름도 없던 시절, 인상주의는 1860년대 한 무리의 젊은 화가들의 우정에서 자라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 중심에는 바지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인상주의라는 거대한 숲을 이루기 위한 씨앗이었고, 친구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든든한 나무였습니다. 그리고 너무 일찍 진 꽃이었습니다.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바지유. 그의 그림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찬란합니다. 선명한 햇살과 빛이 상징하는 청춘의 아름다움과 함께 젊은 날의 미숙함과 고민, 치기와 불안까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바지유가 그토록 그리고 싶었던 ‘지금 이 순간’은, 그렇게 그림 속에서 영원히 멈췄습니다.
**Bazille: Purity, Pose, and Painting in the 1860s (Dianne Pitman 지음), The Private Lives of the Impressionists(Sue Roe 지음), New Yorker 전시 평론 'Frederic Bazille’s Short Career, Reconsidered'(Peter Schjeldahl)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가장 앞부분의 전사 장면 묘사는 프랑스의 미술사학자 François Daulte의 전기문을 따른 것입니다.
***새 책 <명화의 비밀, 그때 그 사람>이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