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상 6관왕을 수상한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필리핀계 배우가 맡았던 남자 주인공 역할을 다음 달부터 백인 배우가 대체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다. 제작진은 "작품이 모든 인종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띤다"는 입장이지만, 현지 팬들과 아시아 배우들 사이에선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품에서마저 아시아계 배우가 소외당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남자 주인공에 백인 배우 발탁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가 공동 창작한 '어쩌면 해피엔딩'에는 인간을 돕기로 설계된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서울과 제주도를 배경으로 사랑을 키워나가는 두 로봇의 인간적인 이야기에 한국은 물론 해외 관객들도 감동했다. 2016년 대학로 초연 이후 작년 11월 뉴욕 브로드웨이로 건너간 어쩌면 해피엔딩은 지난 6월 공연계 최고 권위의 토니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작사·작곡상 등 6개 부문을 휩쓸며 K뮤지컬의 역사를 새로 썼다.
논란은 지난달 24일 '어쩌면 해피엔딩'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이 백인 배우 앤드류 바스 펠드먼을 올리버 역으로 발탁한다는 소식을 공개하면서 시작됐다. 그동안 올리버를 연기한 필리핀계 배우 대런 크리스의 뒤를 이어 펠드먼이 다음 달부터 9주간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다. 현재 '어쩌면 해피엔딩' 출연진은 8명(대체 배우 4명 포함) 중 7명이 아시아계 미국인, 하와이 원주민 또는 태평양 제도 출신이다.
아시아계 배우와 일부 팬들은 즉각 반발했다. 한국 배경의 '어쩌면 해피엔딩'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백인 배우 투입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브로드웨이에서 설 자리가 좁은 아시아계 배우들은 이번 캐스팅을 배역과 상관없이 백인 배우를 우선 기용하는 '화이트워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 공연예술인 행동 연합은 성명을 내고 "'어쩌면 해피엔딩'은 브로드웨이에서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연과 조연을 모두 맡을 드문 기회를 제공했지만, 이번 캐스팅은 배제의 또 다른 선례가 됐다"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올리버 역은 크리스가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토니상 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역할로, 많은 아시아계 배우들이 유명세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겨져 실망감이 더해졌다. 필리핀계 유명 배우 콘라드 리카모라는 "우리가 아시아 대표성을 위해 투쟁하는 순간에도 배제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며 "배우를 꿈꾸는 아시아 미국인 남성 배우를 위한 장학 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제작진 "아시아계 필수 아냐"
제작진 측은 진화에 나섰다.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사랑과 상실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깊이 다가가기 위해 로봇에 관한 공연을 만들었다"며 "아시아계 배우가 모든 역할을 연기할 수 있도록 작품을 쓰고자 했지만 로봇 역할에 항상 아시아계 배우들이 캐스팅돼야 한다는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국적이 없는 로봇 역할인 만큼 다양한 인종적 배경의 배우들이 참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캐스팅을 철회하라"는 소셜미디어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일정 수준의 수익을 내야 공연을 지속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2019년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의 에반 역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한 펠드먼은 티켓 파워를 거느린 스타로 평가된다. '어쩌면 해피엔딩' 여주인공 헬렌 제이 쉔과 실제 연인 관계라는 점도 마케팅 측면에서 유리하다. 워싱턴포스트의 나빈 쿠마르 평론가는 "이번 결정은 중대한 실책"이라면서도 "이번 캐스팅은 브로드웨이의 엄청난 운영비와 올 가을 새로운 공연과 경쟁해야 한다는 점이 고려됐다"고 분석했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