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편재 문제의 제도적 해결 시도
“증거는 상대방이 쥐고 있는데, 입증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대기업의 기술자료 유용 행위로 피해를 입었음에도 소송을 포기해야 했던 중소기업들의 하소연이다. 핵심 설계도면, 제조공정 데이터, 내부 이메일 등 결정적 증거는 모두 상대방 사업장에 있고, 피해기업은 침해 사실만 알 뿐 이를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2026년 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생협력법 개정안은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를 범부처 차원에서 최초로 도입했다. 이 제도는 독일식 전문가 사실조사와 영미법계의 증거개시제도를 결합한 것으로, 2028년 2월 20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개정안은 전문가 사실조사, 당사자 신문, 자료보전명령의 3대 패키지를 도입한다. 전문가 사실조사 제도는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상대방의 사무실이나 공장에 출입하여 자료를 열람·복사하고 장치를 작동·계측하는 등의 조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자료보전명령은 증거 멸실이나 훼손을 방지하며, 당사자 신문 제도는 재판 진행을 보완한다. 중소벤처기업부의 행정조사 자료도 법원의 요구가 있을 경우 제출이 의무화된다. 다만 변호사법 제26조의2에 따른 변호사-의뢰인 간 의사교환 내용 또는 서류는 조사 대상에서 명시적으로 제외된다.
상생협력법에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신설됨에 따라 하도급법 개정 논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김남근 의원이 2025년 8월 발의한 하도급법 개정안에는 동일한 3대 패키지에 더해 형사처벌 조항까지 포함됐다. 공정거래위원회도 2025년 11월 기술탈취 근절대책에서 하도급법 개정을 공식 천명했다. 하도급 거래 역시 기술자료 제공이 필수적이고 증거가 위탁기업에 편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공정거래 실무 환경의 변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은 공정거래 실무에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첫째, 소송과 공정위 신고의 동시 진행이 일반화될 것이다. 과거에는 입증이 어려워 공정위 신고에만 의존했으나, 이제는 법원의 전문가 사실조사로 확보한 증거를 공정위 신고에도 활용할 수 있다. 반대로 공정위 조사 자료를 민사소송에서 활용하는 ‘크로스 유틸리제이션’도 가능해진다.
둘째, 손해배상 소송이 급증할 가능성이 높다. 입증 장벽이 낮아진 만큼 그동안 포기했던 소송들이 일시에 제기될 수 있다. 특히 징벌적 손해배상이 적용되는 기술자료 유용 사안에서는 배상액이 실손해의 3배까지 인정되므로, 기업 입장에서는 막대한 재무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셋째, 사전 증거보전 신청이 전략적 무기로 부상한다. 소송 제기 전 자료보전명령을 받으면 상대방의 증거 인멸을 원천 차단할 수 있고, 이는 그 자체로 강력한 협상 카드가 된다. 위반 시 형사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당장 해야 할 일
원사업자와 위탁기업은 지금부터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한다. 우선 기술자료 요구 과정을 문서화하고, 정당한 요구·사용 근거를 명확히 남겨야 한다. 외부 기술자료와 자체 개발 기술을 구분하여 관리하는 시스템 구축이 필수적이다.
영업비밀 보호 대책도 점검이 필요하다. 전문가 사실조사 과정에서 자사의 영업비밀이 노출될 가능성에 대비하여 비밀유지명령 신청 등의 보호 장치를 준비해야 하며, 전문가 선정 과정에서 이해상충 가능성을 검토하고 조사 범위의 적정성을 다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법률자문 형식의 문서화도 중요한 대응 수단이다. 변호사-의뢰인 비밀특권이 명시적으로 보호되는 만큼, 민감한 의사결정 과정은 법률자문 형식으로 문서화하여 특권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메일 등 커뮤니케이션 자료도 향후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관리가 필요하다.
제도 운용상 과제와 성공 조건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입법 취지대로 작동하려면 몇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제도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적 통제는 충분한지, 영업비밀 보호와 증거 확보의 균형점은 어디인지 등 실무적으로 다양한 질문에 직면할 것이다.
2028년 시행까지 약 2년의 준비 기간이 남았다. 20년 넘게 논의된 제도인 만큼, 학계와 실무가 머리를 맞대고 세부 운용 방안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특히 법원의 전문가 풀 구성, 조사 매뉴얼 마련, 변호사-의뢰인 비밀특권 지침 수립 등 구체적인 운용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BKL 공정거래리포트]에서는 변화하는 경쟁법 환경 속에서 기업이 직면하는 주요 규제 이슈, 공정거래 정책 동향, 주요 판례와 조사 사례를 분석하고 기업 경영과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시사점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김규식 변호사는 공정거래, 공정거래조사 및 소송, 기업인수합병(M&A), 하도급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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