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이 순삭"…강남 직장인들 점심시간 짬내서 '우르르'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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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박스 극장 낮잠 '1000원' 이벤트 열어…전 시간 매진
강남 직장인·대학생·취준생 남녀노소 다같이 수면
올해 주요 트렌드 '베드 로팅'·'치유를 위한 게으름' 선정

메가박스 낮잠이벤트 현장 사진/사진=유지희 기자

메가박스 낮잠이벤트 현장 사진/사진=유지희 기자

"진짜 자는 거야?"

영화관 출입구 앞에서 나누는 대화 속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감돈다. 하지만 입장 후 풍경은 달랐다.

19일 점심시간을 앞두고 서울시 강남구 메가박스 강남점 상영관 앞에는 학생과 직장인들이 모여들었다. 팝콘을 든 사람은 없었다. 대신 커피를 들고 안대를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이 찾은 건 영화가 아니라 1000원짜리 '휴식'이다. 메가박스 강남점이 진행 중인 '메가쉼표' 이벤트로 리클라이너 좌석에 누워 힐링 음악과 함께 두 시간 동안 쉬는 프로그램이다.

참여자들의 이유는 다양했다. 50대 직장인 김모 씨는 "회사 근처라 궁금해서 왔다. 직장인이라 늘 피곤한데, 오늘은 점심도 포기하고 편하게 쉬고 싶었다"고 말했다.

강남 소재 정보기술(IT) 기업 직원 차지혜(33) 씨는 직장동료 2명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그는 "SNS에서 보고 점심시간을 활용해 왔다. 평소에도 피곤하면 짧게 자는 편이라 관심이 갔다"고 설명했다.

대학생 이다미(21)씨는 "어제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고 학원 숙제도 있어서 월, 화, 수 스케줄이 빡빡했다. 짬 내서라도 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옆자리에 있던 수험생 정승재(25) 씨는 "입시 준비 중이라 스트레스가 많다. 이런 기회가 자주 있으면 돈 내고서라도 이용할 것 같다"고 부연했다.

"마감은 어쩌고"…기자도 정신 놓고 '쿨쿨'

메가박스 '낮잠 상영관'/사진=유지희 기자

메가박스 '낮잠 상영관'/사진=유지희 기자

매일 아침 5시 30분 기상, 마감과 일정에 쫓기는 일상이 익숙한 기자. 처음엔 '과연 영화관에서 잠이 올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그런데 리클라이너에 몸을 맡기는 순간 오해는 단숨에 풀렸다.

11시 30분 상영관이 암전되며 수면에 도움을 주는 음악과 영상이 재생됐다. 처음엔 살짝 뒤척이던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 눈을 감은 채 잠깐 숨을 고르니,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 바쁜 점심시간이라는 사실도 잊혀갔다. 정확히 언제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에서 깨고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극장 안을 둘러보니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즐긴 흔적이 보였다. 롱 패딩에 몸을 감싼 사람, 의자를 끝까지 젖혀 고개를 푹 숙인 사람,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사람 등이 있었다.

이벤트 체험 중인 기자의 모습/사진=유지희 기자

이벤트 체험 중인 기자의 모습/사진=유지희 기자

1시 30분, 힐링 음악과 함께 알람 소리가 울렸다. 상영관 곳곳에서 가벼운 기지개 소리가 들렸다. 휴식을 마친 관객들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둘 극장을 빠져나갔다.

휴식을 마친 관객들은 일어나면서도 "영화관인 거 잊고 있었다", "나는 안 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잠들었다", "꿈까지 꿨다. 내가 발표하고 있는 꿈"이라며 여운을 곱씹고 있었다.

공기업 준비생 이은석 씨(26)는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데 공강 시간에 짬 내서 왔다"며 "취업 준비가 가장 큰 스트레스인데, 휴식 후 확실히 개운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휴식'도 돈 주고 산다. 피로사회가 만든 트렌드

출처=메가박스

출처=메가박스

글로벌 트렌드 예측 기업 WGSN은 올해 주요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치유를 위한 게으름(Therapeutic Laziness)'을 선정했다. '베드 로팅(Bed Rotting, 침대에 누워 시간 보내기)'이 유행하고 수면 관광이 새로운 산업으로 떠오르면서 이제 휴식도 하나의 소비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난 17일 시작된 '메가쉼표' 이벤트는 단순한 모든 상영관 리클라이너 좌석 리뉴얼 홍보 목적을 넘어 강남 직장인과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영화관에서 쉬려는 사람들로 인해 연일 전석 매진이 이어지고 있다.

이벤트는 오는 21일까지며 소등한 2개 상영관을 휴식 공간으로 마련해 이용객들에게 새로운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

메가박스 관계자는 "모든 상영관을 리클라이너 좌석으로 리뉴얼하면서 이를 알리기 위해 기획했다"며 "강남은 직장인과 학원가가 밀집된 지역이라, 암전이 가능한 상영관에서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는 콘셉트가 잘 맞아떨어졌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영화관이 '쉼의 공간'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강남의 한 수면카페/사진=유지희 기자

강남의 한 수면카페/사진=유지희 기자

이날 빅데이터 분석업체 썸트렌드에 따르면, 지난 한 달간 '낮잠카페' 검색량이 전년 대비 11.76% 증가했다. 특히 강남의 한 수면 카페는 점심시간에만 하루 80명 이상의 손님이 다녀갈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강남에서 9년째 수면 카페를 운영 중인 정운모(57) 씨는 "평일 오후 1시 50분인데도 수면실이 꽉 찬다"며 "강남에는 휴식 공간이 마땅치 않아 평균 80명이 방문하고 이 중 절반이 수면 고객"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카페는 시간당 8000원의 요금으로 운영되며, 한 달 평균 2000명이 찾고 있다. 그중 1000명 이상이 낮잠을 목적으로 방문할 정도로 수요가 높다.

정 씨는 "주 고객층은 직장인과 학생들"이라며 "하루 9시간 넘게 일하는 강남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 1~2시간의 휴식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현대인의 새로운 가치 '질 좋은 휴식'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현대인들에게 휴식은 단순한 쉼을 넘어 중요한 삶의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는 휴식을 쾌적하고 질 높게 즐기는 것을 중시하며, 이를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현대인들은 휴식할 때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쾌적하고 질 좋은 경험을 원한다"며 "특히 젊은 세대는 쉬는 것, 자는 것, 노는 것, 여가 활동 자체를 가치 있고 생산적인 일로 여기기 때문에 이에 대한 소비를 아끼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극장을 예로 들며 "영화관이 고객의 체류 경험을 늘리기 위해 편안한 휴식 공간을 조성하는 것도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며 "이런 환경이 소비자의 극장 친숙도를 높여 재방문율을 높이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휴식의 중요성은 건강과 직결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충분한 휴식이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조절하고, 수면의 질을 개선하며, 신체 에너지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강승걸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성인의 권장 수면 시간은 7시간이며, 수면 부족이 있을 경우 야간 수면을 늘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하지만 이를 보충하기 어려운 경우, 20~30분 정도의 짧은 낮잠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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