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정상, 긴급회담 개최
유럽군 창설 등 자구책
젤렌스키는 중동 순방行
“뮌헨안보회의, 유럽에 악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종전을 위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팜비치 국제공항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종전을 위한 대화에 젤렌스키 대통령도 관여하냐는 질문에 “그도 관여할(be involved) 것”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가 언제 어떻게 협상에 참여할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패싱’할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옹호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체를 점령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아니다. 그는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울러 젤렌스키 대통령이 경고한 러시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침공 가능성을 우려하냐는 질문에는 “조금도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같은 날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CBS와의 인터뷰에서 “‘진짜 협상’이 시작되면 우크라이나는 침략당했기 때문에 (종전 협상에) 참여해야 할 것이고, 유럽인들은 푸틴과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고 있기 때문에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견 유럽 패싱 논란을 불식하기 위한 차원의 발언이었으나, 루비오 장관 역시 구체적인 일정을 내놓지 않았다.
당장 18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릴 미국과 러시아 간 고위급 회담에 초청되지 못한 우크라이나는 중동 지역을 찾아 미·러 중심의 현 구도를 타파하기 위한 외교전에 나섰다. 16일부터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 등 중동 순방에 나선 젤렌스키 대통령은 해당 지역에서 러시아나 미국 대표단을 만날 계획은 없다고 키이우인디펜던트가 전했다.
이날 UAE 공항에서 관리들과 회담을 하는 영상을 게시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텔레그램을 통해 “우선순위는 더 많은 포로를 귀환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UAE 방문을 시작으로 사우디와 튀르키예를 잇달아 방문한다. 그동안 러시아·우크라이나군 포로 교환을 중재한 이들 중동 국가를 상대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종전 협상에서도 중재자 역할을 부탁할 가능성이 높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사우디에서 진행되는 고위급 회담이 예비적인 성격을 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러시아와만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를 보여주는 듯하다고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6일 보도된 NBC뉴스와 인터뷰에서 “미국 국민이 뽑은 트럼프 대통령을 믿는다”면서도 자국을 협상 테이블에 포함하지 않은 미국과 러시아 간 종전 협정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또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종전 협상에 유럽 동맹국들이 동참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나토가 미국의 지원을 얻지 못하면 러시아가 올여름께 유럽의 특정 지역을 침공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이 보복할 위험이 없다고 러시아가 믿으면 옛 소련 지역 등 유럽 일부를 점령하기 시작할 것”이라며 “작은 나라들부터 시작할 것이고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이 될 위험도 있다”고 주장했다.
앞마당에서 발생하는 전쟁의 종전 협상에조차 배제될 처지에 놓인 유럽은 황급히 움직이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7일 파리에서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정상과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을 초청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유럽 지도자들은 이번 회담에서 미국이 유럽과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협상을 진행하는 것에 반대하는 뜻을 모았다. 유럽은 러시아에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이 끝날 경우 향후 역내 안보 위협이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은 또 우크라이나 안보를 위해 평화유지군 창설에도 속도를 낼 분위기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일간 텔레그래프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유럽은 자체적인 안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 한다”면서 평화유지군 창설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당초 유럽 주도의 평화유지군 구상은 마크롱 대통령이 먼저 제안했다. 침묵을 지켜왔던 스타머 총리가 이 주장에 동조하면서 유럽 주도의 평화유지군 창설이 현실화할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는 유럽이 방위비 지출을 늘리는 등 새로운 군사 강화 정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달 23일 독일 총선이 끝나면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반발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종전 협상을 빠른 시일 내 마무리 지을 태세다.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 관리들에게 부활절인 오는 4월 20일까지 종전이 이뤄지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고 블룸버그가 이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다만 익명의 소식통은 전쟁을 빠르게 끝내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이 “야심 차지만 잠재적으로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의 시작 단계에서 개최된 뮌헨안보회의는 대서양 동맹의 분열만 보여줬다는 지적이 나왔다. 러시아가 3년 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유럽의 단결을 이끈 미국이 오히려 유럽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이날 분석했다. 뮌헨안보회의에 참석한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유럽의 민주주의는 결함이 있다”면서 유럽 체제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후 그는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알리스 바이델 공동 대표와 회동하며 유럽 극우세력을 지지한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다.
나탈리 토치 로마 국제관계연구소 소장은 NYT에 “밴스 발언은 러시아가 유럽 내 분열을 조장하려고 할 때 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전했다. 크리스토프 호이스겐 뮌헨안보회의 의장은 독일 ZDF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뮌헨안보회의는 유럽에 악몽이었다”며 “트럼프 치하의 미국은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는 BBC에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이 매우 불안한 시대를 만들고 있다”며 “이는 러시아, 중국과 같은 국가들을 대담하게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NYT는 뮌헨안보회의에서 미국 고위 당국자들의 언행으로 인해 트럼프 행정부하에서 미국은 러시아와 연합해 유럽을 괴롭히거나 유럽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