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절벽…초기 창업 생태계 '붕괴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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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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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에 본사를 둔 벤처투자사 A사는 이달 초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벤처캐피털(VC) 등록 취소 통보를 받았다. 2018년 설립 이후 소규모 프로젝트 펀드를 중심으로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했지만 올 상반기 신규 투자가 ‘0건’에 그쳐 자본잠식률이 50%를 넘었다. 최소한의 전문 인력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작년에만 다섯 차례 정부의 시정명령과 경고 조치를 받았다.

벤처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올해 상반기 VC 다섯 곳 중 한 곳은 단 한 건도 투자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금이 과거 실적이 탄탄한 대형 VC에만 집중돼 신생 VC는 등록 자격을 잃거나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악순환에 내몰렸다.

◇ VC 5곳 중 한 곳은 ‘개점휴업’

투자 절벽…초기 창업 생태계 '붕괴 위기'

7일 한국벤처투자협회 전자공시시스템(DIVA)에 따르면 올 상반기 투자 실적이 ‘0원’인 VC는 총 61곳이다. 전체 등록 벤처투자회사(355개)의 약 17%가 사실상 ‘깡통 투자사’로 전락한 셈이다. 2022년 32곳, 2023년 41곳, 지난해 43곳에서 올 들어 급증했다. 기업공개(IPO), 인수합병(M&A) 등 회수 시장이 막히자 VC가 신규 투자를 꺼리고, 기존에 투자한 기업의 생존에만 매달리는 등 시장 전체가 악화일로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벤처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등록 취소·청산으로 사라지는 VC도 속출하고 있다. 핵심 원인은 회수 시장 경색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IPO 상장예비심사 청구 기업은 53곳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88곳) 대비 39.7% 급감했다. IPO뿐 아니라 M&A까지 줄줄이 막혀 자금 회수 길이 사실상 끊겼다. 상장이 예상됐던 케이뱅크, DN솔루션즈, 롯데글로벌로지스 등 업종별 굵직한 기업들마저 상장을 철회하자 “이제는 출구가 없다”는 절망감이 업계에 팽배하다.

투자 절벽…초기 창업 생태계 '붕괴 위기'

회수 불능 상태는 곧바로 출자자(LP) 자금 집행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안전 자산만 찾는 LP들의 태도 변화로 신규 펀드 결성은 사실상 멈춰 섰다. VC업계 관계자는 “펀드 만기가 다가오는데도 회수 수단은 없고, 신규 투자 여력은 더 줄어들어 투자 공백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금융당국 규제까지 겹쳐 VC들은 몸살을 앓고 있다. 캐피털사와 증권사 등 주요 LP가 위험가중자산(RWA) 지표를 맞추기 위해 매출 없는 벤처기업에는 아예 투자할 수 없다는 내부 원칙을 세우고 있어서다. 2년 전 투자사를 세운 VC 대표는 “상반기에만 35곳의 캐피털사를 돌았지만 투자에 응한 곳은 단 3곳이었다”고 말했다.

◇ 초기 창업 생태계 ‘붕괴 위기’

자금이 일부 대형 VC에만 몰리면서 소형 VC는 고사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VC업계 관계자는 “대형 VC는 과거 실적과 오랜 네트워킹 능력으로 LP를 끌어오지만, 신생 VC는 프로젝트 펀드 단계에서 규모가 더 큰 블라인드펀드로 확장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VC의 투자 공백은 스타트업 생태계의 가장 약한 고리인 초기 창업자에게 직격탄이 되고 있다. 벤처투자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 상반기 시드~시리즈A 단계 투자 건수는 338건으로 지난해(592건) 대비 42.9%가량 줄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중·후기 라운드에 투자금이 몰렸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에서 인공지능(AI) 서비스를 개발 중인 한 창업자는 “예전 같으면 아이디어만으로도 제안이 왔지만 이제는 매출·수익·실적을 모두 입증해야 겨우 검토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이 같은 ‘투자 절벽’이 단기 현상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문가들은 VC에 들어가는 돈이 모태펀드 등 정책자금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중기부에 따르면 2023년 신규 결성된 벤처 투자금액 중 정책자금 비율은 16.7%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엔 23.0%까지 급등했다. 사실상 공적 성격을 지닌 연기금·공제회(3.1%) 투자 금액까지 합치면 전체의 4분의 1을 훌쩍 넘는 수준이다.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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