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러-우 전쟁 기원은 20세기 초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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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대륙/키스 로 지음·노만수 옮김/640쪽·3만8000원·글항아리


1945년 5월 8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직후의 시간을 ‘슈툰데 눌(Stunde Null·제로 시간)’이라고 부른다. 기존 체제가 무너진 시기, 들끓는 복수심은 평화 대신 더 잔혹한 폭력을 가져왔다. 유럽 각지에서 여성 수백만 명이 성폭행을 당했다. 크로아티아인은 세르비아인을, 우크라이나인은 폴란드인을 죽이는 등 파편화된 차별과 학살이 난무했다.

이 책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의 기원이 제2차 세계대전에 있다”며 반인도적 폭력의 근간이 만들어진 20세기 전후(戰後) 초기 유럽의 역사를 파헤친다. 언론인 출신 역사가이자 소설가인 저자가 치밀한 논증과 풍부한 사례를 담아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냈다.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됐으며, 국제작가협회(PEN 인터내셔널)가 주관하는 ‘헤셀 틸먼 상’을 수상했다.

책은 이미 많은 연구가 이뤄진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과 옛 소비에트 연방, 북유럽까지 아우르면서 전쟁 직후의 야만적 상황을 다룬다. 1945년 유럽 전승기념일이 선포된 뒤에도 대륙 전역에선 폭력이 이어졌다.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에서 민족주의자들은 1950년대까지 소련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더 잔혹한 보복이 민간인 사이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독일 민간인들은 유럽 전역에서 구타당하거나 살해당했다. 1945년 전쟁 직후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블라이부르크 강제 송환 사건은 희생자 수만 명을 낳았다. 패전국들의 군인과 민간인이 유고슬라비아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피란했으나 영국군에 의해 강제로 송환됐다. 대부분 처형되거나 열악한 환경에 처한 채 숨졌다.

저자는 이 같은 복수 행위가 “도덕적 우위성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렀을지언정 누가 전후 권력의 지배권을 쥐고 있는지 입증해 주는” 공동체적 도구였다고 지적한다. 개인에게는 더 이상 역사적 사건의 수동적 방관자가 아니라는 환상을 심어주면서 잔혹한 복수의 메커니즘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전쟁으로 인한 도덕적 수렁에서는 모든 민족과 정치 종파가 희생자인 동시에 범죄자였다”고 역설한 대목은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대해 다시 한번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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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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